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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카페 사진 캡처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카페 사진 캡처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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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것으로 해요."

교회집사님들과 영화나 연극을 보자고 했다. 오십이 넘은 아줌마들은 때려 부수는 것이나 심오한 뜻(?)을 내포한, 머리를 굴려야 의미를 알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싫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도 중년이 되면 삶 자체가 인고의 세월이었기에, 심각한 것을 일부러 찾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비록 가상의 삶을 그린 영화나 연극일지라도.

'심각하지도 말며, 무섭지도 말며, 엄마표 감동을 찾는다고 눈물 콧물 빼게도 말며, 그냥 한바탕 속의 것을 끌어내 웃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원했다. 여름이다 보니 극장가는 온통 스릴러 공포물이 대세다.

수소문 하던 중에 연극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을 강력 추천 받았다. 워낙 장기 공연 중인 연극이라서 일행들도 매체를 통해 얼추 알고 있었고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이라서 공연료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다.

공연장으로 들어가면서 "있을 것은 다 있네, 이런 옷들을 어디서 구해왔을꼬" 아줌마들이 한마디씩 던져 넣는 무대를 보니 세탁물과 연관된 온갖 잡동사니들이 옷들과 어울려 오래된 세탁소 전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는 '오아시스 세탁소'는 40년 전에 맡겨 논 옷조차도 보관하고 있는 세탁소다. 주인은 몸과 마음이 어수룩한 사람이다. 약삭빠른 세상에서 어떻게 견디어 낼까 싶게 어눌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옷을 다림질 할 때도 맡긴 사람을 떠올리며 정성을 다한다. '허리는 세우고, 어깨는 펴고, 칼라에서는 자존심을 세우고'…. 그렇게 다려진 옷을 입고 모든 일이 술술 풀어지기를 기대해 준다.

그의 부인은 어떤가. 세탁소 한쪽 귀퉁이에서 수선을 하며 남편을 향해 '이깟 세탁소'를 처분하고 부자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으로 이사해서 세탁편의점을 내자고 종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꿍얼거림 속에는 남편만큼이나 세탁소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있다. 혹시나 남편이 그러자고 할까봐 은근 겁내는 여자다. 부창부수다.

그녀의 연기에 관객들은 옴팍 젖어 들었다. 소극장 좁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옷을 맡기러 동네 세탁소에 왔다가 은근슬쩍 수다 소동에 동참하고 있는 느낌이다. 산울림의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가 어둠 속에 깔리고, 세탁소에 숨겨놓았다고 여기는 보물을 찾아 사람들이 옷 속을 종횡무진 할 때, 내 몸도 옴실옴실 해졌다.

어둠을 핑계 삼아 은근 슬쩍 무대에 섞여 들어가 한바탕 신명나게 뛰고 싶었다. 세탁배달부와 간병인, 또 세탁소를 드나드는 이런 저런 사람들의 연기가 고명처럼 얹혀 잘 맞물려 돌아가는 수레바퀴 같기도 하고 찰진 인절미의 빈틈없는 결 같기도 했다.

손님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세탁소 주인이 "아버지 나 살기 힘들어요" 할 때는 왕창 웃다가 얼결에 잠시 콧방울이 시큰해진다. 그 마음이 내 마음 같고, 누구나 한두 번씩은 겪으며 지나가는 마음일 테니까. 어려울 때 아버지(윗세대)를 찾다니, 요즘 보기 드문 현상이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 어른들보다 더 빠르게 세상을 읽고 있는 젊은이들은 이제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어른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할 일이 없어 민망하다. 그러나 세탁소 주인은 아버지가 맡아 놓은 몇 십 년 된 세탁 옷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고, 아버지의 '오래된 수첩'에서 어려움을 해결할 방도인 '세탁법칙'을 찾아낸다.

"얼룩은 맛을 보아 그 반대의 성질로 빼준다" 아버지의 세탁법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란 소리다. 주인은 아버지의 세탁법칙을 삶의 법칙으로 대체한다. 그리고 '삶에 속아' 잠시 찌든 때로 묶였던 사람들을 향해 원망하지 않고 이해한다. 오히려 그들의 옥죈 마음을 그의 천직인 세탁으로 풀어준다. 그렇게 사람들의 옷뿐만 아니라 마음도 빨아주게 된 '오아시스 세탁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건재해야할 거다.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러 갔다가, 주인과 주인마누라, 그리고 놀러온 이웃집 사람들과 한통속이 되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저녁밥 할 때가 된 느낌으로 연극이 끝났다. 관객도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 많다. 모두들 '모처럼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다', '장기공연 할 만하다' 등등 만면에 웃음이다.

잊고 살았던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 그대 길목에 서서~ 예쁜 촛불로 그대를 맞으리… 아~ 한마디 말이 노래가 되고 시가 되고~~' 환청처럼 노래가 따라온다. 내 20대가 함께 따라온다. 연극을 보고 덤으로 받은 선물이다. 


태그:#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 #연극, #소극장,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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