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0년대 처음으로 전태일의 삶에 눈을 떴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통해 선배들이 꼭 읽어보라며 권해준 책이지만 솔직히 그때 책의 내용이 가슴 저미는 실감이 되어 다가오진 않았다. 책 읽을 무렵 나이가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며 외쳤던 전태일의 나이와 비슷했지만 전태일과 같은 처절한 환경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남보다 한 발 늦게 느끼고 한 발 늦게 행동하는 무디고 굼뜬 대학생에 불과했던 탓이다.

 

결혼 초에 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는 좀 더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작은 활자가 아닌 움직이는 영상이 주는 효과도 있었지만, 굼뜬 대학 시절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심성이 조금은 형성되었다고나 할까. 그런 심성을 갖추는 데 아내가 살아온 과거가 한몫 했다. 결혼 전까지 생산 현장에서 일을 해서 오빠 대학을 졸업시킨 아내의 삶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전태일 평전>을 통해 전태일의 죽음이 아닌 삶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는 신영복 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그의 죽음 이상으로, 점심 굶고 일하는 시다들에게 자신의 버스비를 탈탈 털어 풀빵을 사주던 모습, 먼지 구덩이 속에서 일하다가 폐병에 걸려 각혈하다 해고당하는 여공들의 고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모습이 주는 의미를 먼저 생각하자는 말이 오랜 기간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아들 녀석들 읽어보라고 사온 만화 <태일이>에 아들들보다 먼저 내가 빠져들었다. 다섯 권 만화를 먼저 보려고 시새우기까지 했다. 2월 마지막 주를 <만화 전태일>과 함께 보냈다. 세 남자의 틈새에서 아내 또한 짬짬이 만화에 빠져들었다.

 

 

성긴 곳 없이 촘촘히 복원시킨 전태일의 삶

 

스무 살 나이에 읽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만난 전태일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전태일이 삶을 통해 보여준 가족사랑, 이웃사랑의 이야기를 본보기삼아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얻었던 최호철은 전태일의 삶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며 살아왔다. 꿈은 이루어졌다. <태일이>란 제목으로 만화 다섯 권이 출간된 것이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읽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도 보고, <전태일 평전>을 통해 인간 전태일의 의미를 되새겼던 내게 만화 <태일이>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동과 가슴 저미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만화 <태일이>가 이전의 책이나 영화보다 더 생생한 이유는 뭘까. 시퍼런 청년시절부터 전태일의 삶을 만화로 그려보려는 꿈을 가슴에 품고 오랜 세월 준비해온 최호철이 종횡으로 촘촘하게 엮어간 탄탄한 구성력에다가, <을지로 순환선>에서 보여주었던 삶터를 중심으로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세밀하게 보여주었던 치열한 작가정신이 바탕이 되어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불꽃처럼 살다 간 열사 전태일'의 거룩한 삶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가족, 이웃에게 따뜻하게 다가가고자 애쓰며 살았던 평범한 우리의 이웃, 친근한 형이며 오빠 같았던 태일이의 모습을 진솔하게 시대적 상황과 함께 보여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고, 가슴 속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동에 젖어들게 한다.

 

만화 <태일이>의 삶에 흠뻑 빠져 지내다 보면 스물 두 살 청년 태일이가 자신의 몸을 불태워 이루고자 했던 꿈은 참된 사랑이었음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맑고 순수한 청년의 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태일이 세트 - 전5권

최호철 그림, 박태옥 글,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돌베개(2009)


태그:#전태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