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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이의 돌날 돌잡이 후에 찍은 사진
▲ 성한 씨, 지희 씨의 가족 사진 주연이의 돌날 돌잡이 후에 찍은 사진
ⓒ 구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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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잠 잘 자는 학생들 이름으로 하는 빙고 게임에 제 이름이 제일 중앙에 있었어요".

하버드 의대를 졸업하고 유명 종합병원 소아과 과장을 지낸 지희 씨가 던진 말에 폭소를 금치 못 했다. 처음에 '슬립퍼(sleeper) 빙고'라는 말이 낯설어서 금방 알아듣지 못 하고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하버드 의대 수업 시간에 제일 잘 조는 사람들 이름으로 빙고판을 만들어서 수업 시간에 조는 사람들을 하나씩 지워서 빙고를 하면 이기는 게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걸릴 확률이 제일 높은 위치에 지희 씨의 이름이 적히곤 했다는 것이다.

순간 정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1등으로 꼽히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것도 그냥 학부 과정이 아닌 의대 수업 중에 학생들이 존다는 사실도 믿기 힘든데 그런 것을 재미삼아 슬리퍼 빙고라는 우스운 게임을 한다는 사실이 정말 황당하기까지 했다.

"저는 5분도 안 되어서 바로 이렇게 됐어요" 라고 하면서 지희 씨는 졸음에 겨워 고개를 뒤로 떨구는 모습까지 재연해 보였다.

"저도 많이 잤어요. 그냥 책 보고 나중에 공부하면 성적은 잘 나오니까 강의 시간에는 잤어요"

2009년 가을 학기 동안 한국과 중국에 다녀온 은희 씨가 여행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발표하고 있다.
▲ 2009년 가을학기 방학식에서 발표하는 오은희 씨 2009년 가을 학기 동안 한국과 중국에 다녀온 은희 씨가 여행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발표하고 있다.
ⓒ 구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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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을 21살에 졸업하고 구글에서 우수 직원 상을 받을 정도의 재원인 오은희 씨가 거든다. 오은희 씨는 프랑스계 캐나다 아버지와 중국계 캐나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한국과는 전혀 인연이 없던 사람이다. 은희 씨는 영어는 물론이고 불어, 중국어, 한국어까지 4개국어를 별 어려움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 학습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어쩌다보니 본교의 더블린 분교 중급반은 한 명의 스탠포드 대학원 졸업생과 하버드 의대 졸업생, 하버드 법대 졸업생으로 구성이 되었다. 비한국계 학생들을 위한 수업은 양에 차지 않은 오은희 씨가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개설되는 한국계 미국인들을 위한 수업에 참여하면서부터 이 반은 하버드 스탠포드 졸업생 반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국어 수업은 한 번도 안 졸렸어요. 선생님이 재미있게 가르쳐주고 말을 많이 할 수 있으니까 안 졸려요".

좋은 학생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가보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은희 씨의 이 말에 필자가 평소에 주장하던대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지희 씨와 성한 씨는 우리 더블린 분교 영어권 반에 다니는 한인 3세 재현이의 부모님이다. 재현이가 본교를 온 것은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이제 한글을 읽고 쓰는 일에 익숙해져 있고, 미국 학교에서 자기가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니 정말 반가운 일이다. 그보다 더 반가운 사실은 어렸을 때 한국어를 공부하지 못 한 것을 후회하는 한인2세 지희 씨와 성한 씨가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자기 아이와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정한 사실이다.

성한 씨는 재현이의 아빠로서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큰 회사에서 고문변호사로 일하는 재원이고 지희 씨는 재현이의 엄마로서 하버드 의대를 졸업하고 큰 종합병원에서 소아과 과장까지 하다가 재현이의 동생 주연이를 낳고는 과감히 아이를 위해 일을 그만둔 존경스러운 학생이다.

그래서인지 재현이의 동생 주연이는 갓난아기때부터 엄마 아빠와 함께 한국어 교실에서 자라났다. 이제는 14개월밖에 안 되었는데도 영어로 간단한 말들을 모두 완벽한 문장으로 쓸 수 있고, 한국말도 곧 잘 따라한다. 돌도 되기 전에 수업 중에 '~까지'라는 말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연이가 "까지" 라고 정확히 발음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이제는 '주세요' '고마워요' 정도는 쉽게 할 줄 알게 되었으니 온 가족의 한국어 공부는 반쯤은 성공한 듯 싶다.

슬리퍼 빙고 이야기로 모두 폭소를 하고 있는데 지희 씨가 던진 말에 다시 한 번 쓰러질 뻔 했다.

"비싼 잠을 자는 거지요".

하버드 의대나 법대, 스탠포드 대학의 등록금이 얼마나 비싼지를 생각하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의 학교를 나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래도 필자의 눈에는 한국어를 좀 더 잘 하고 싶어하는 착한 학생들로 보인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좀 더 한국어를 잘 가르쳐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로컬신문[코리아나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한국어, #하버드, #스탠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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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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