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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지역 보도연맹 사건 보도가 나가자 일각에서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실위가 밝힌 분명한 진실은 국가가 민간인에 가한 불법 폭력이 있었고,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념과 상관없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사진은 진실화해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사천지역 보도연맹 사건 보도가 나가자 일각에서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진실위가 밝힌 분명한 진실은 국가가 민간인에 가한 불법 폭력이 있었고,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념과 상관없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사진은 진실화해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 진실화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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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사천지역 보도연맹사건에 관한 진실규명결정서를 발표하면서 22명의 민간인 피해자를 공식 확인했다. 문제는 이와 관련한 보도가 나가자 일각에서는 '희생자=좌익세력'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희생자 가운데 절반 정도만 보도연맹에 가입했으며, 가입자 대부분도 경찰의 회유와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가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좌익에서 전향한 진성 보도연맹원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나서서 확인되지 않은 범죄 사실을 두고 법적 절차 없이 사살한 것은 '불법'이라고 못 박았다.

국가기관이 나서서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마당에 일부 왜곡된 인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뉴스사천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진실위 결정서를 쫓아가며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다.

"국민보도연맹은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관변 단체"

먼저 국민보도연맹은 어떤 단체였는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내용을 따라가 보자.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인다'는 목적을 표방하고 1949년 4월 20일에 결성된 단체이다. 법률이나 훈령에 근거해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지만 중앙본부의 간부진을 살펴보면 김효석 당시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백한성 법무부차관, 장경근 내무부차관, 옥선진 대검찰청 차장이 부총재를 맡는 등 정부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관변단체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 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는데, 지방지부는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사천보도연맹은 언제쯤 결성되었을까? 당시 삼천포경찰서 남양지서 특공대원이었던 김아무개 씨의 증언에 따르면, 남양면에 보도연맹이 조직된 시기가 전쟁 나기 6개월 전인 1950년1월이다.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위원회는 "면단위의 보도연맹이 1950년 1월쯤 조직된 것으로 보아, 사천은 1949년 12월경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록했다. 참고로 인근 진주에는 1949년 12월 8일에 결성되었고, 나머지 경남도내 대부분의 시군 보도연맹이 비슷한 시기에 결성됐다고 한다.

보도연맹에는 누가 얼마나 가입했나?

그렇다면 보도연맹에는 누가 가입한 걸까. 처음에는 남로당 등 좌익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가운데 전향을 결정한 사람들이 주 가입대상이었으나, 생각만큼 가입인원이 없자 회유와 협박으로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이 다수 가입하게 됐다는 게 진실위의 판단이다.

"중앙의 검경 당국은 1949년10월25일부터 1949년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하였다. 남로당 등 좌익단체 가입자들은 자수와 동시에 탈당성명서를 신문 광고란에 발표한 후 국민보도연맹에 조직되었다.(중략)

보도연맹의 일차적인 가입대상은 '좌익전향자'였고, 조직결성의 대외적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전향 좌익에 대해선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은 물론 생활지원까지 한다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의도했던 만큼 조직 확대가 쉽지 않자, 정부는 읍, 면, 동 등 일선 행정기관에 인원수를 할당했다.

경찰과 행정기관들은 인원을 채우기 위해 주민을 상대로 비료와 밀가루 등 배급을 미끼로 가입을 유도했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몰린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좌익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가입되었다."

올해 7월29일에 있었던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 민간인 희생자 유골발굴 중간설명회 현장. 출처: 오마이뉴스 윤성효
 올해 7월29일에 있었던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 민간인 희생자 유골발굴 중간설명회 현장. 출처: 오마이뉴스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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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따르면 1949년 12월 2일을 기준으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고, 이 중 사천에는 19명뿐이었다. 하지만 사천지부가 결성된 뒤 경찰의 강요와 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회원은 크게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진실위는 당시 남양면의 보도연맹 가입자가 81명이었다는 남양지서 특공대원 김씨의 진술로 볼 때 다른 군과 마찬가지로 수백 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조직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렇듯 보도연맹 가입대상을 마구잡이로 늘리던 상황이 국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민주국민당 민경식 의원 등이 장경근 내무부차관을 상대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일삼아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가입되고 있다'고 질의했던 것이다.

사천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개요

2005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에 들어가면서부터 2006년 12월 30일까지 보도연맹 사건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고 유족이 신청한 것은 15건이었다. 진실위는 이들 신청인 15명과 희생 경위를 직접 목격했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참고인 21명을 지난 4월부터 조사했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보도연맹과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것이 확인된 사람은 22명이다.

22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고 모두 남자다. 괄호 안은 태어난 해, 살던 곳, 살해당한 곳.

김○○1(1920, 용현 덕곡, 질매섬), 김○○2(1925, 용현 덕곡, 석계야산), 김○○3(1927, 용현 덕곡, 질매섬), 정○○(1920, 정동 대곡, 석계야산), 손○○1(1925, 삼천포 서리, 질매섬), 강○○(1923, 용현 용치, 석계야산), 손○○2(1923, 용현 용치, 질매섬), 손○○3(1916, 삼천포 동림, 노산공원), 김○○4(1904, 사남 우천, 질매섬), 이○○1(1913, 곤명 추천, 미확인), 이○○2(1925, 남양 송포, 노산공원), 이○○3(1923, 사천 중선, 질매섬), 이○○4(1928, 사천 중선, 노산공원), 진○○1(1904, 사남 화전, 질매섬), 진○○2(1907, 사남 병둔, 석계야산), 진○○3(1897, 사남 화전, 질매섬), 이○○5(1920, 사남 화전, 석계야산), 이○○6(1928, 사남 병둔, 석계야산), 김○○5(1915, 사남 화전, 석계야산), 김○○6(1918, 사남 화전, 석계야산), 김○○7(1916, 사남 구룡, 석계야산), 박○○(1917, 삼천포 동림, 노산공원)

수 십 명 이상의 사천지역 민간인이 경찰에 희생 당한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수 십 명 이상의 사천지역 민간인이 경찰에 희생 당한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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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과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사천지역 희생자들도 주로 경찰의 강요와 권유에 의해 보도연맹에 가입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진실규명결정서 일부분.

"희생자 손1은 삼천포출하조합(현재의 수협)에서 노동일을 하였는데, 친구의 권유로 삼천포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삼천포경찰서에 잡혀갔고 경찰들의 권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중략) 희생자 진1, 진2는 사남지서에서 강제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고, 희생자 이6은 형이 좌익 활동을 하다가 1950년 2월에 경찰에 잡혀가서 고문을 받고 죽었는데 이 일로 지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하게 되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보도연맹원들은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또 보도연맹 사무실은 따로 없었으며, 지서에서 이들을 관리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사천경찰들은 보도연맹원을 관리하기 위해 우익청년단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대동청년단(마을사람들은 지서특공대라고 불렀다) 단장이었던 이○○(사천군 용현면 덕곡리 거주)는 삼천포경찰서 사찰계 형사를 등에 업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빨갱이로 모는 등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보도연맹원들은 어떻게 희생되었나

진실위 조사에 따르면 사천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7월경 경찰에 의해 삼천포경찰서와 각 지서에 소집돼 구금되었다. 소집 과정에 우익청년단도 일부 동원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희생자 진3과 이4는 대한청년단 단원들에게 연행되었다.

각 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삼천포경찰서로 이송됐고, 이후 삼천포 노산공원과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에서 희생됐다. 노산공원에서의 학살은 주로 7월 17일과 7월 31일에 일어났다. 반면 질매섬 학살은 7월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진행됐다. 사천지서에 구금돼 있던 사람들은 7월25일 삼천포경찰서로 이송 도중 트럭이 고장을 일으키자 용현면 석계리 야산에서 사살당했다.

삼천포 노산공원. 이곳에서도 1950년 7월중순부터 하순 사이에 많은 민간인이 희생 당했다.
 삼천포 노산공원. 이곳에서도 1950년 7월중순부터 하순 사이에 많은 민간인이 희생 당했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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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한 유가족과 참고인들의 구체적인 진술이 진실규명결정서에 담겨 있다. 이에 따르면 희생자 대부분은 경찰의 소집 명령에 자진 출두했고, 출두 한 지 하루 또는 이틀 만에 희생됐다. 며칠씩 구금돼 있었던 희생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학살이 있기 직전 노산공원과 질매섬에는 미리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석계리 야산에서는 경사진 곳을 이용해 즉석 구덩이를 팠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가족들은 대부분 시신 수습 과정에서 "시신을 알아볼 수 없어 옷을 보고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또 일부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밖에 용현 덕곡리 야산, 서포 비토섬에서 죽은 사람이 있다는 진술도 나왔지만 공식화 되지는 않았다. 이런 가운데 당시 남양지서에 구금됐던 81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어이없는 상황으로 죽음을 모면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다음은 남양지서 특공대원으로 근무했던 김아무개 씨의 진술이다.

"남양면 보도연맹원은 81명이었다. 주로 좌익으로 찍힌 사람들을 가입시켜 지서에서 관래했다. 전쟁 발발 후 삼천표경찰서 일선 담당이 남양초소를 점검 차 총을 쏘았는데 이아무개 주임과 순경 3명이 인민군의 습격으로 오인, 도주한 상태에서 김아무개 청년단장이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석방해 모두 죽음을 면했다."

아픈 역사 앞에 국가는 고개 숙이고 유가족은 당당해야

이상이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사천지역 보도연맹사건의 대략적 개요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경찰의 민간인 학살'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국가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용현면 석계리 야산에서도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무참히 살해됐다.
 용현면 석계리 야산에서도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이 무참히 살해됐다.
ⓒ 하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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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조사기간이 너무 짧았고, 공식으로 확인한 희생자 수도 추정에 비해 너무 적었다. 이는 진실위의 활동기간이 한정돼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위가 활동기간을 더 늘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와 상관없이, 이제는 진실을 밝혀내는 일에 지역사회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는 점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규명한 진실은 사천지역 희생자가 22명이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도연맹원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군과 경찰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밝혀내지 못한 숙제가 남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비극에서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여전히 이념의 굴레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지역사회 전체의 노력이 이제는 필요한 때다. 그리고 이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들은 더 이상 숨죽일 필요 없다. 오히려 부당한 폭력을 가해 가족을 살해하고, 그럼에도 제대로 하소연 한 번 못한 지난 세월을 국가와 사회가 나서서 보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어야 하지 않을까.

유가족들의 이런 발걸음이 가볍도록 시민사회도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사천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뉴스사천, #보도연맹, #사천, #학살,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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