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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길 모퉁이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왔다. 전신이 무엇인가로 흠뻑 젖은 그는 우왕좌왕하며 주위가 술렁이고 있던 그 대낮의 길바닥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불타오르는 몸으로 무엇인가에 강하게 분노한 그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죽어갔다. 이전에는 본 적도 없는 낯선 광경에 주위는 충격의 도가니였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는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경제성장 구호에 묻힌 사회경제적 분열

60-70년대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끔찍한 동족산장의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우리가,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은 남부럽지 않게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었다.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시대는 마치 국민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듯 했다. 국민소득을 증대시키고 수출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며 박정희 시대는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비상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내 집에, 자동차 한 대씩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온다고 인내할 것을 이야기했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와 결합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강력한 유혹이었다. 우리는 그저 참고 견딘 채, 국가를 위해 '근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본분인 줄 알았다. 정작 그 돈이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집중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 그것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불경'이었다.

전태일로 인해 까발려진 세상

전태일은 죽음으로서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그의 죽음은 고통일 뿐이었다.
▲ 영정을 끌어안고 우는 어머니 전태일은 죽음으로서 살아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그의 죽음은 고통일 뿐이었다.
ⓒ 전태일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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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이런 현실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은폐되어 있던 사회의 어두운 면을 까발렸다. 전태일에 의해서 '폭로'된 세상은 그야말로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좁디 좁은 다락방에서 갇힌 닭 마냥 쪼그려서 12~15시간 일을 하고 있는 어린 여공들의 모습. 어두운 불빛 아래서 시력을 잃고 손을 찔리며 폐혈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기계에 손가락이, 팔이 잘려나가도 보상은커녕 해고당하는 불쌍한 인간 군상.

사회가 이런 모습들에 충격을 먹었던 것은 물론 그 적나라한 노동현장 실태에 대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 남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렇게 순수했던 청년이 몸에 불을 끼얹고 분신한 모습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삶에 대한 성찰과 자각이 얼마나 있었냐는 점을 반추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사회는 자신의 처지와 부(富)와의 간극, 국가적인 구호 아래 묻혀버린 생명까지 위협받는 자기 삶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벌어진 경제적 격차. '분열'을 직시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

오늘날 우리에게 이 때 까발려진 '분열'이 얼마나 봉합되었는지, 통합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떳떳하게 답할 수 없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필연적으로 수반한 삶의 양극화, 경제적 양극화는 좁아지기는커녕 벌어지고 있다. 80년대가 되면 모든 가정집이 자동차도 한 대씩 가지고 남부럽지 않게 떳떳하게 살 수 있다고 한 약속의 결실은 지켜지지도 않고, 잊혀진 지도 오래다.

여전히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은 부유하다. 대선이나 총선이 되면 정치인들은 중산층이 많아지는 세상, 혹은 경제통합을, 양극화 해소를 외치며 시장바닥으로 뛰어들지만 결국 우리의 시장바닥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때 뿐이지뭐~~"

설상가상 IMF와 이가 강제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정치인들이 내미는 '경제정책'이라는 손은 기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회로의 도태와 가난의 대물림으로 결국  '투사화' 되어갔다. 그리고 이들과 '태생적'인 환경부터 다른, 부를 독점한 계층들은 이들의 구호와 상황을 이해 못한 채로 이들과 대치하거나 공허한 '대화'만을 부르짖을 뿐이다.

경제적 양극화에서 시작된 분열은 이제 경제를 넘어 문화적, 사회적인 분열을 촉진시키는, '분열의 도미노'를 만들고 있다. 이 '분열의 도미노'는 이제 서로를 이해하지도, 용인하지도 못하게 타자화 시켜 거대한 충돌을 만들어 낼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재밌지 않은 이유

이런 사회적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KBS 2TV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가 재밌지 않다.

행복전도사는 우리시대의 계층화되고 차별화된 '행복'을 역설적인 개그로 표현하고 있다.
▲ 개그콘서트의 행복전도사 행복전도사는 우리시대의 계층화되고 차별화된 '행복'을 역설적인 개그로 표현하고 있다.
ⓒ KBS영상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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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전도해준다는 '행복전도사'는 극단적으로 이런 사회분열을 풍자하고 있다. 행복전도사는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사람이라며 '커피자판기에서 고급 커피가 아니라 100원 아끼려고 일반 커피를 뽑는 사람들', '집에 차가 한 대 밖에 없는 기름 값 걱정하는 사람들'을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처럼'은 살지도 않은 것 같은 이 개그 속의 행복전도사는 결국 이제는 '행복'이라는 것도 '집에 차 몇 대 씩은 있는', '길거리 떨어진 오백 원짜리 천 원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80년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던 TV 속의, 영화 속의 상황과는 너무 판이하다.

결국 '행복'이란 것도 이제 경제적,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부과되거나 존재하
지도 않을 수 있다는 인식. 이 사이에서 우리가 언급했던 '소박한 행복', '방글라데시 인들의 행복'은 외면당하고 잊혀진 보잘 것 없고 하찮은 행복이 되어가는 것일까?

이 씁쓸하고 극단적인 개그는 오래 못 갈 것 같다. 답도 해결책도 마련되어있지 않은 씁쓸한 세상에 사는 씁쓸한 사람들에게 억지 웃음 뒤 씁쓸함을, 3단 콤보로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정말 '씁쓸하기' 그지 없다.

'분열'과 '통합', 구호의 시발점으로서의 전태일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의 가장 큰 화두는 '사회통합'이었다. 이 사회통합은 물론 정치권에서 의견대립을 미봉하려는 의도로 정치적으로 남발되는 구호여서 식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남발' 조차도, 결국은 우리의 자상과제가 사회통합이 되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실로 사회통합은 지상과제라 할 것이다.

사회통합의 가장 중점적인 과제는 결국 양극화의 해소다. 그리고 이 양극화 해소는 가장 주요한 원인인 경제적 양극화를 타파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경제통합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시점이 어딘지를 살펴본다면 바로 앞서 말한 전태일 사건에서 부터일 것이다. '통합'은 '분열'을 목도한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의 '맹목'과 '고통'을 목격하게 된 그 시점. 그 시점에 전태일이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의 초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태일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분열을 목격하게 된 최초의 시점이자 통합을 부르짖게 된 발화점이다.

전태일은 그의 동료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했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이들을 위한 그의 행동은 전태일이 진정 삶다운 삶을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 전태일은 그의 동료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했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이들을 위한 그의 행동은 전태일이 진정 삶다운 삶을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 전태일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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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통합을 위해서

그래서 나는 다시 전태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사회지도층은 미싱공장 안 어두운 램프를 교체해주는 등 '온정'에 나섰지만 이는 그야말로 사회적인 충격을 무마하기 위한 생색내기에 그쳤고, 80~90년대의 전태일을 따라하며 투신하는 사람들만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분명 그들이 말하는 것은 '통합'이었을 테지만, 그 통합의 구호는 어설펐고 서툴렀기에, 혹은 진정성이 없었기에 실현시킬 수 없는 구호였으며 역기능만 남았었다.

오늘날 우리의 지도층이 내뱉는 '통합'의 구호도 이런 양상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깊은 사유'의 근원은 전태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전태일이 맹목적 통합과 달콤한 환상을 강제하던 사회적 최면에서 깨어나고 파멸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전태일의 행복

분신자살로 생을 마친 전태일은 역설적이게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일기, 자전적 글, 바보회를 조직해 노동환경개선과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했던 청년적 면모는 그가 진정 꿈꾸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전태일의 행복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요, 소박한 것이었고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돌아오는 11월 13일은 전태일의 39주기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다시 전태일을 생각한다.
이 극단적인 분열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그가 치열하게 살고자, 또 삶을 통해 얻고자 했던 행복을 생각한다. 생색내기를 넘어 진정한 '통합'을 이루기 위한 고민은 결코 이와 다른 곳에 있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혜교 시민기자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역사문화학과에 재학중인 대학생입니다. 연락처는 tothelife@hanmail.net



태그:#전태일, #행복전도사,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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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우진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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