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나는 혼자 서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것이 나를 생각 많은  조용한 소년으로 만들었다. 나는 연립 임대주택의 가구와 카펫 사이에서 스스로 놀잇거리를 찾아내고, 혼자 이기고 지는 놀이를 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척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으로 자랐는데, 가끔은 자기 의견을 자신 있게 털어놓지 못해 남들에게 음흉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나는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워하며 좁고 어두운 집에서 살아가는 부모의 외아들이었다.-책속에서

주인공 안톤은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겨워하는' 궁색한 가정의 외동아들이다. 안톤 가족이 겨우 마련한 임대주택은 비좁고 어둡다. 어찌나 옹색한지, 풍차동작(양팔을 벌려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는)도 못할 정도다. 주거인의 안락과 편리보다는 눈에 보여 지는 도로와 주거단지만을 우선하여 부속물처럼 지었기 때문이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운 안톤의 부모는 세상과 일정한 선을 긋고 산다. 시청 교통과 소속인 아버지는 전차기지로 회송된 전차들의 바퀴를 손질하거나 전차기지 청소를 한다. 어머니의 유일한 기쁨은 한 달에 한번 꼴로 있는 가족의 대중목욕탕 나들이. 부부는 벽으로 둘러싸인 비좁은 집에 들어와야만 안심을 할 만큼 세상에 허약한 서민들이다.

소심하고 착한 아들인 소년 안톤은 정지된 듯 웅크리며 살아가는 부모와 비좁은 집에 답답함을 느끼고 탈출을 꿈꾸기도 한다. 이런 안톤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고스란히 안아 준 것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그 위의 보트들이다. 그리하여 안톤은 강에 대한 오랜 열망으로 어느 날 부유층 사람들이나 가입하는 조정 클럽에 주제넘게 가입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그들 주변만을 맴돈다. 말하자면 아웃사이더. 이 소설에는 안톤 외에 또 다른 아웃사이더가 등장한다. '다비트'와 '슈나이더 한' 박사가 그들.

소설의 배경은 암스테르담.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안톤네처럼 가난한 서민들이 살고 그 건너에는 부유층 사람들이 사는데 다비트는 이 부유층 거리에 산다. 그리하여 안톤과는 모든 조건이 '하늘과 땅'처럼 대조적이다. 하지만 둘은 결국 한몸의 일체감까지 느끼게 된다. 부유하나 부유한 그들과 섞이지 못하는 다비트. 왜?

감독 '슈나이더 한' 박사는 부유층 자녀인 다비트와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늘 혼자인 안톤을 조정 경기 한조로 묶어 훈련을 시킨다. 그 결과,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이지 못할 것 같은 둘은 서로를 느끼고 의지, 여러 차례 우승을 한다. 그런데 정작 슈나이더 한은 소년들이 승리할 때마다 멀찍이서 얼굴을 가리고 기뻐할 뿐이다. 도대체 왜? 그는 누구인가?

<안톤의 여름>겉그림
 <안톤의 여름>겉그림
ⓒ 사계절

관련사진보기

소설은 많은 것들을 품고 유유자적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고 평화롭다. 또한 강물이 주는 평화와 건강한 은어들이라도 팔딱거려 눈부신 강물의 생동감에 자주 휩싸이기도 한다.

강물과 조정 경기 훈련, 슈나이더 한과 다비트와의 관계 속에서 1938/1939년 여름, 안톤은 눈부시게 성장한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나약하고 소심한 소년이 아니다. 벽 뒤에서 웅크리고 사는 부모와 달리 자신감이 넘친다. 소년은 이처럼 조정을 통해 듬직하게 성장한다.

때문에 이 책을 읽다보면 세상과 새로운 눈뜸을 하며 방황도 번민도 많았던, 많은 것들이 불안정했던 청소년기와, 그때 만났던 사람들과 그중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사람과, 특별한 계기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작가가 소외받는 아웃사이더, 주변만을 맴도는 소년의 내면과 조정이란 운동을 통해 눈부시게 변해가는 육체, 세상에 막 새로운 눈뜸을 하는 청소년기의 특별한 존재로 인한 특별한 경험의 수줍음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책에 흠벅 빠져들 수 있는 좋은 방법 두 가지

이런지라 이 책은 주인공 안톤과 비슷한 또래의 청소년들, 내면의 성장통을 겪는 청소년들이 읽으면 썩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더욱 의미 있게 읽을 수 있는 힌트 하나는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8/39년과 1944년이라는 시기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에서 어떤 특별한 사건들이 전개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든다. 유럽 대륙에 전운이 감돌고, 나치의 광풍이 본격적으로 몰아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빗나가고, 시대 상황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파괴된 도시와 전투기의 묘사에서 얼핏 암시될 뿐이다. 다비트와 부모는 어떤 사람들인지, 슈나이더 한의 정체는 무엇인지, 5년 사이 안톤은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인지, 슈나이더 한과 다비트는 그 사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서도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곳이 없다. 다만 정황상 다비트는 나치에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역자의 말 중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추측하게만 할뿐, 이런 것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시대적 상황을 수채화의 배경처럼 옅게 처리했을 뿐이다. 유럽 전역에 '반 나치 운동'과 '전운'이 감돌던 그 무렵 상황인 배경이 두드러지면 원래 도드라져야 할 것이 묻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중요한 것을 위해 나머지는 모두 생략해버리는 이런 점은 이제까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아 몇 안 되는 네덜란드 소설인 이 작품의 매력이다.

사족. 이 책은 1318문고, 즉 청소년을 위한 성장소설이다. 사춘기란 세상을 향한 성장통을 앓고 있는 중2 내 딸을 위해 선택한 책인데, 아이는 얼마쯤 읽다가 지루하다며 덮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읽힐 수 있을까?' 그렇게 집어들어 읽은 책, 역시나 처음부분이 더디 읽혔다. 5년 후에 돌아온 안톤이 5년 전 여름의 정황을 회상하는데 작가가 시대적 배경을 뚜렷하게 알려주지 않고 있어 처음에 자칫 정황 파악이 혼동스럽기 때문이다.

이처럼 첫부분이 더디게 읽히는 책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하나. 책의 처음부터 순서적으로 읽으려고만 하지말고 이야기가 모두 끝난 맨 뒤의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어라. 옮긴이의 말을 통해 소설 전체를 파악하라. 이 책 역시 마찬가지. 옮긴이 박영대는 작가가 부각시키지 않고 수채화의 배경처럼 옅게 처리하고만 배경과 독자들이 상상해 볼 수 있는 것들을 6페이지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다. <안톤의 여름>을 파악하는데 무척 도움이 된다.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인 안톤, 부모의 테두리안에서만 생활하던 안톤이 그해 여름에 조정과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을 통해 얻는 삶의 성취감이 눈부시도록 빛나는 소설이다. 특히 내 아이와 같은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어 안톤처럼 어둡고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눈부신 성장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황금같은 시기인 사춘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해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청소년들이 부디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사족이 너무 길어진다. 책을 덮은 지 며칠, 언젠가 TV에서 본 조정경기가 자꾸 떠오른다. 소설 속 화자인 나, 즉 안톤의 조정의 여러 동작 설명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덤이다. 이제까지 무심하게 보던 조정이 특별하게 와 닿는 그런 소설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경기 종목인 조정은 퍽 특이한 운동이다. 세상 모든 것이 대개 앞을 보고 나아가는데, 조정은 뒤를 보면서 나아간다. 앞을 보지 않고도 방향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불안해 보이지만 보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쑥쑥 나아간다. 키잡이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잘 살펴서 보트가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진로를 조종하기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오로지 눈앞의 목표에만 집착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우리에게는 시사  하는 바가 클듯하다. 뒤를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지나온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은 좀 더 현명한 삶이 보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정의 노잡이들처럼 말이다. -옮긴이의 말중에서

덧붙이는 글 | 안톤의 여름 | H. M. 반 덴 브린크 지음 | 박종대 |사계절 |8천 5백원



안톤의 여름

H. M. 반 덴 브린크 지음, 박종대 옮김, 사계절(2009)


태그:#청소년, #성장소설, #사춘기, #네덜란드, #조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