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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주아문. 동헌과 함께 충남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온주아문. 동헌과 함께 충남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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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임금이 온천에 거동한 덕택에 군(郡)으로 승격한 온양군

맹씨행단을 나와서 온양의 옛 행정 중심지였던 아산시 읍내리를 향해 간다. 지도 상으로 계산해 보니, 걸어서 30~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건치연혁 조는 온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4년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溫昌)이라 칭호를 고쳤더니, 16년에 이를 다시 나누어 온수현(溫水縣)을 설치하였는데, 세종 24년에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건치연혁 조

벌써 모내기를 마친 논이 그 안에 산 그림자를 담아 제 모습을 어여쁘게 단장하고 있다.  이따금 모내기를 하느라 바쁜 농부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이윽고 읍내리에 도착한다. 크지 않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슈퍼라든가 약방같이 생긴 조그만 약국 따위가 있는 게 전형적인 시골 면 소재지 느낌을 풍기는 곳이다. 이곳이 옛날 온양의 다운타운이다.

온주아문은 읍내리 서북쪽 산 아래 있다. 옛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청 건물인 동헌이 있던 곳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오래된 것이 아니다. 조선 고종 8년(1871) 때 세워진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국정 쇄신 차원에서 각 고을의 성벽과 관아를 신축했는데 그때 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건물 처마에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는 현판을 걸었을까. 이 건물이 지어질 당시엔 이미 이곳은 온양군으로 불리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왜 신라 문무왕 때의 이름인 온주였던 것을 따서 붙인 것일까. 다시 신라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당시 온양 군수의 회고 심리라도 작용했던 것인가?

이 2층 문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5m 높이의 사각뿔 모양 주춧돌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2층엔 누마루를 깔았으며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왼쪽에 누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가로막아 놓아 누에 올라 전망하지 못해 아쉬웠다.

'복원'이란 인간의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허한 관념

관아 건물.
 관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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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문을 통과해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동헌이 기다리고 있다. 이 동헌도 아문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부터 주재소로 쓰이다가 해방 후에는 파출소로 쓰였다고 한다.

1986년 온양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1988년까지 2년 동안은 읍내동 동사무소로 쓰였다. 이 동헌이 수리·복원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993년의 일이었다.

동헌은 앞면 6칸·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이다. 조선 후기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邑誌)를 모아 책으로 엮은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는 이 동헌의 규모가 10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현재의 건물은 약 절반으로 축소해서 복원한 셈이다.

이런 것도 '복원'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복원'이란 인간의 언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허한 관념인지도 모른다. 보존만이 가장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정말이지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건 마누라뿐이 아니고 문화재 역시 그렇다.

관아의 가구(架構).
 관아의 가구(架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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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대청마루에서 바라다본 풍경. 저 앞쪽에 보이는 산이 설화산이다.
 관아 대청마루에서 바라다본 풍경. 저 앞쪽에 보이는 산이 설화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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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 마루에 올라앉으니, 설화산이 아주 가까이 바라다보인다. 정면에 버티고 선 아문이 전망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관아 대청 마루에 앉아서도 앞 들에서 농부들이 들녘에서 모 심고 벼를 베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저 자리에 문을 세운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원래 저곳이 아문이 있던 자리가 맞긴 맞는 것인지.

뒤꼍으로 돌아가자, 와편으로 만든 굴뚝 두 개가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옛날 관아의 굴뚝이 저러했을까?" 싶을 만큼 어설프기 짝이 없다.

관아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자 길가에 서 있는 보물 제537호 읍내리 당간지주가 홀로 고독을 견뎌내며 서 있는 낯선 풍경과 조우한다.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깃발을 말하고 지주는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말한다.

보물 제537호 읍내리당간지주.
 보물 제537호 읍내리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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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에서 들여다 본 당간지주.
 안쪽에서 들여다 본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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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으로 된 이 당간지주는 위·아래 기둥의 굵기가 별 차이가 없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히 고정하기 위한 네모난 홈이 파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위·아래 두 곳에 구멍이 있지만 이 당간은 위쪽에 하나만 구멍이 있다. 기둥 바깥쪽 두 모서리를 깎아내어 마치 세로 줄무늬를 새긴 것 같은 효과를 준 것도 특이하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왜 당간지주는 뜬금없이 이곳에 홀로 서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몇 백 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온주아문 자리가 본래는 절이 있던 자리가 아닐지 추정해 본다. 고려시대까지는 절이 있다가 조선시대 배불정책의 일환으로 절을 폐사시키고 그 자리에 관청을 세운 것이리라.

절을 없앨 때, 왜 이 당간지주는 부수지 않고 그대로 남겨준 것일까. 절이 폐사된 이후 저 당간지주는 읍내리를 알리는 이정표 대신 사용되지 않았을까.

당간지주와 작별하고 나서 기념물 제115호 온양향교를 향한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온양향교는 산기슭 아래에 있다. 원래는 법곡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하며 광해군 2년(1610)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운 것이다.

쓸모를 잃었다는 건 영혼을 잃었다는 뜻

충남도 기념물115호 온양향교.
 충남도 기념물115호 온양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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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선 하마비와 홍살문이 나그네를 맞는다. 그러나 향교가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향교로 들어가는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담장 위로나마 안을 들여다볼까 하여 까치발을 했지만 끝내 담장의 높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다는 안내판 설명을 참고삼아 건물 배치를 상상해보는 것으로 대신하며 자리를 떴다.

갑오개혁 이후 향교의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춘추로 제향을 올리는 일 외엔 별 달리 하는 일이 없는 게 우리나라 각지에 산재한 향교의 실태다. 그러나 어느 지방에선 향교에서 방학 때 아이들에게 한자와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저렇게 마냥 닫아두기만 하는 것은 향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체(體)만 남고 용(用)을 잃어버린 것은 안쓰럽다. 공후인 같은 악기도 그렇고 저 향교·당간지주· 관아 건물도 그렇다. 쓸모를 잃었다는 건 영혼을 잃었다는 뜻이다. 영혼이 없어 타 존재와 소통하고 교류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막막한 것인가.

흔히 사람들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가. 그것은 타 존재와 소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통은 남과 더불어 살기 위한 첫 번째 발디딤이다. 내가 때때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시들어가는 내 영혼에 생생한 기(氣)를 불어넣고자 함이다.

맹씨행단 근처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여기서 온양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물었을 때 아주머니는 "멀어서 걸어서는 절대 못가요."라고 했다. 길가에 선 나무나 꽃들. 그것들은 내겐 일종의 쉼터다. 때로는 꽃들에게서 쉬어가고 때로는 나무에게서 잠시 쉬어 가다 보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지치지 않는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온양온천역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23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온양 , #읍내리 , #온주아문,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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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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