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계 3대 피라미드로 웅장하기 그지없다. 45도의 경사각을 딛고 올라가기가 수월찮다.
▲ 태양의 피라미드(Piramide del Sol) 세계 3대 피라미드로 웅장하기 그지없다. 45도의 경사각을 딛고 올라가기가 수월찮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높이가 66m, 너무 같잖았다. 자전거로 하루 100km씩 달리는 내게 겨우 이 정도의 숫자놀음은 살짝 콧방귀를 뀔 수준일 뿐이었다. 계단이 248개, 이거 뭐 애들 장난도 아니고, 소싯적 고향 목포 유달산 정상까지 산책(차마 등반이란 표현을 쓰기도 민망한 정상 228m다)할 때도 계단 수는 이것보다 수 배는 많았다.

명색이 이집트에 맞설 정도의 멕시코 최대 피라미드가 겨우 이 정도인가, 살짝 김 샐 때쯤 바로 앞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국가 문명의 흔적이 보였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의 한 구절처럼 피라미드는 시각과 공간의 괴리 속에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은근히 잡히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확인한 '저질체력'

유적지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반겨준 녀석. 잔디밭 곳곳에 이들의 이동 경로로 구멍이 뚫려있다.
▲ 두더지 유적지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반겨준 녀석. 잔디밭 곳곳에 이들의 이동 경로로 구멍이 뚫려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잠시 후 "이거 뭐야?"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들어 앞뒤를 번갈아 돌아본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죽도록 계단을 타고 올랐는데 올라온 길은 마을 뒷산이요, 올라갈 길은 에베레스트 산이었던 것이다.

"저기 아주머니, 솔직히 안 힘들어요? 난 죽겠구만. 야, 꼬맹아, 너 진짜 괜찮아? 도대체 여길 어떻게 그렇게 쉽게 올라가는 거냐?"

몇 계단 안 된다던 피라미드를 중간도 채 못 갈 정도로 '저질 체력'의 밑천이 드러난 지금, 한참 뒤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이내 나를 앞질렀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10살도 안 된 아이들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야무지게 올라간다는 점이었다.

'형아, 무슨 엄살이 그리 심해? 장난하지 말고 빨랑 올라 와.' 맥박이 요동치고 오만 인상 찡그린 채 난간을 붙잡고 계단에 걸터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멋쩍게 웃어본다.

아예 기어가는 아이도 있고, 중간에 잠시 쉬는 남자도 보인다. 45도 경사졌기에 결코 만만한 오르막이 아니다.
▲ 피라미드 오르는 길 아예 기어가는 아이도 있고, 중간에 잠시 쉬는 남자도 보인다. 45도 경사졌기에 결코 만만한 오르막이 아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형, 장난해?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나도 올라갔다 왔는데.”
▲ 솜브레로 쓴 귀여운 꼬마가 눈으로 말한다. “형, 장난해?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나도 올라갔다 왔는데.”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얘들아, 형아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니들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높은 곳에서 살아서 최대한 산소를 빨아들이는 피지컬 체계가 완성된 상태지만... 이 형아는 말이다, 해발 0m의 바다도시에서 살고 왔거덩. 봐라, 그니깐 뭐냐 충분한 고도 적응이 아직 안 되었단 거지. 그래서 숨쉬기가 곤란하고, 에 또….'

이렇게 눈빛으로 강렬히 말하는데도 애들 앞에서 스스로 초라해지는 이유는 뭘까. 괜히 구차해지는 것 같아 슬프다. 그늘 한 점 없는 거친 오르막 계단을 올라가는 건 고역이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청풍에 청승맞게 시 한 수 읊어본다.

'피라미드 높다하되 하늘 아래 돌계단이라 / 오르고 또 오르면 유적 전경 감상하거늘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사진만 찍고간다 하더라.'

무한한 환상을 자아내는 피라미드

후들거리는 다리로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태양의 피라미드' 정상에 올랐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피라미드를 오르다니 감격적인 순간이 따로 없었다. 정상은 뾰족하지 않고 밋밋한 평지로 되어 있는데 바로 신전이 세워져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피라미드의 서쪽에는 4각형 단이 6도의 경사각으로 일몰 위치를 보인다. 이 방위각은 태양의 회귀선으로 하짓날 태양이 정확히 태양의 피라미드 정면을 비추도록 설계되었다. 즉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축복해 주는 것이다. 이 태양의 신전은 끝없는 높이와 무한한 공간으로 환상을 자아낸다. 거대한 신전의 계단 밑에 서 있는 인디오는 신전 꼭대기에 있는 제사장을 잘 볼 수 없으며 단지 끝없는 높이와 무한한 공간으로 환상을 자아낸다.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바라본 달의 피라미드와 그 주변 전경.
▲ 달의 피라미드(Piramide de la Luna) 태양의 피라미드에서 바라본 달의 피라미드와 그 주변 전경.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소매로 땀을 훔치고 바라본 테오티우아칸의 전경엔 지상에서 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위엄이 서려 있었다. 수백 개의 신전에서 드리는 제사와 1000개의 공동주택에서 5만 여명이 살아가는 광대한 풍경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원전 2세기경에 건축되어 기원후 3세기에서 6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루고 7세기경 이민족에 의해 멸망한 나라.

하지만 그 명성은 사라지지 않고 후대 부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이곳은 특히 아즈텍 부족이 이곳으로 순례여행을 하곤 했을 정도로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 모든 사상을 집약시켜놓은 중요 지점이다. 그들은 장엄한 피라미드군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지은 도시'라고 믿었다. 게다가 10~12세기에 멕시코 중부를 지배했던 톨텍족이 쓰던 나와틀어에 의하면 이곳은 아예 '인간이 신이 되는 곳'이다. 그 장엄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바로 눈앞에 펼쳐 있는 것이다.

태양의 피라미드를 내려와 다시 달의 피라미드로 향했다. 유적들 한 가운데 곧게 뻗어진 메인 스트리트인 '죽은 자(死者)'의 길을 걷는데 폭이 45m에 길이만 4km에 이른다. 엄청난 무더위에 걸음을 옮길 적마다 숨이 턱턱 막혀오고 몸은 땀으로 젖어든다. 얕잡아 봤던 규모에 대해선 이미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다.

달의 피라미드에서 바라 본 풍경. 테오티우아칸의 하이라이트다. 왼편에 태양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 죽은 자의 길(La Calle de los Muertos) 달의 피라미드에서 바라 본 풍경. 테오티우아칸의 하이라이트다. 왼편에 태양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 길이 끝나는 중앙에 달의 피라미드가 있다.
▲ 죽은 자의 길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 길이 끝나는 중앙에 달의 피라미드가 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달의 피라미드에 올라서 본 테오티우아칸의 전경 또한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죽은 자의 길 정면에서 바라보이는 대로(大路) 양쪽에 정갈하게 늘어선 건축물을 보니 마치 줄지어 인사를 받는 형국이다. 바로 옆은 달의 피라미드에서 제례를 관장하던 신관의 주거지인 께쌀빠빨로뜰 궁전이다. 크기는 작지만 지대가 높아 높이는 태양의 피라미드와 비슷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곳에서 더욱 중요한 제사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이곳은 대부분 거석이어서 웅장함과 무거움이 특징이다.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아치 모양이나 궁륭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르따블레라는 건축 양식으로 경사진 기반 위에 수직으로 판면을 끼워 넣은 기단, 그것의 중첩이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를 이룬다. 건축 기구가 빈약하여 기중기나 도르래는 물론이고 바퀴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지렛대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시대에 건축된 피라미드는 어딜 가도 그 공법이 미스터리다.

깃털이 난 뱀으로 물과 농경의 신인 껫살꼬아뜰과 비의 여신인 뜰랄록과 번갈아 가며 화려하게 장식된 성벽.
▲ 껫살꼬아뜰 신전(Temple de Quetzalcoatl) 깃털이 난 뱀으로 물과 농경의 신인 껫살꼬아뜰과 비의 여신인 뜰랄록과 번갈아 가며 화려하게 장식된 성벽.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관광객들은 제단 위에서 가이드의 지시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내지르는 등의 행동으로 그 옛날 기도모습을 재현한다.
▲ 기도 관광객들은 제단 위에서 가이드의 지시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내지르는 등의 행동으로 그 옛날 기도모습을 재현한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타임머신을 타고 1500년 전으로 되돌아가다

다시 돌아오는 길, 달의 피라미드 바로 옆 께쌀빠빨로뜰 궁전을 찾았다. 하과레스, 뜰락록, 께쌀 등의 신들의 벽화가 선명한 색으로 남아있어 그들의 미술기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깃털이 난 뱀으로 물과 농경의 신인 껫살꼬아뜰과 비의 여신인 뜰랄록과 번갈아 가며 화려하게 장식된 껫살꼬아뜰 신전을 한 번 더 방문했다.

매끄러운 석고 위에 밝게 채색되어 아름다움을 뽐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어 지금은 검붉은 색 흔적만이 남아 있는 곳. 하지만 테오티우아칸에서 가장 건축학적 화려함을 자랑하는 이곳에는 바로 앞 제단에서 2008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옛날의 그 기를 받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점심 때 도착한 도시국가를 여유롭게 다 둘러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언제 다 사라졌는지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시간, 테오티우아칸 죽은 자의 길 위에는 썰렁하게 나 홀로 남게 되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1500년 전 시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곳으로 시선을 옮길 때마다 나는 제사장이 되고, 평민이 되고, 때론 포로가 되었다. 어쩌면 스스로 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달의 피라미드에서 제례를 관장하던 신관의 주거지로 신들을 주제로 한 화려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 께쌀빠빨로뜰 궁전(Piramide de Quetzalpapalotl) 달의 피라미드에서 제례를 관장하던 신관의 주거지로 신들을 주제로 한 화려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느낄 수 있는 거라곤 피라미드의 웅장함과 내 뺨의 땀을 쓸어가는 바람 뿐인, 그래서 너무나 적막해 그 고요함이 되레 생경스러워 부담스러운 이곳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자연과 신과 홀로 대면하기는 뭔가 어색한, 군중을 따라 살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서둘러 몇 걸음에 빠져나오자 멕시코시티에 주재원으로 파견 나와 일일가이드를 해 준 승재 형이 바깥 출입문과 이어진 께쌀빠빨로뜰 궁전 그늘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유적 관람은 끝이 났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도시국가를 빠져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물을 마시는 일이었다.

그래, 유적을 본 소감은 어때? 대단했냐고? 정말 대단했다. 다른 건 또 없냐고? 솔직히 힘들었다. 하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테오티우아칸에 온다면 높이 오를수록 더 깊이 볼 수 있다고. 땀 흘린 만큼 더 감탄하게 될 거라고. 그리고 모자와 물은 꼭 챙기라고. 준비없이 왔다 태양신이 노하기라도 하는 날은 대책 없단다.

[최근 주요기사]
☞ [언론노조 총파업] "언론 7대 악법은 제2의 유신헌법"
☞ 한나라당, 방송만 잡으면 집권 연장 가능?
☞ 심상정 "사회적 대타협? 지나가는 소가 웃는다"
☞ 서울대보다 고려대가 좋다? 고대생들도 그럴까
☞ [엄지뉴스] '언론 5적'에게 규탄 문자를!
☞ [E노트] 지금 KBS 노조 게시판은... "부끄럽지 않으시오?"

덧붙이는 글 | 기사에 나와 있는 역사적 사실은 모두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이해(학문사 / 정경원 외)’에서 참고인용 했습니다.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세계일주, #멕시코, #자전거여행, #피라미드, #라이딩인아메리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