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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의 마지막 날, 먼저 들른 곳은 시안의 상징으로 통하는 7층 대안탑(大雁塔)이 있는 자은사(慈恩寺)였다. 시안시의 남쪽 성곽 인근에 위치한 자은사는 당 고종이 황태자 시절인 648년, 죽은 자신의 어머니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위해 창건하였으며 대안탑은 652년 고종 시기 건축되었으나 곧 허물어지고 현재의 것은 701년 측천무후 시절 10층으로 건축된 것인데 전화로 파괴되어 7층만 남아 있다.

 

대안탑(大雁塔), 그 기러기와의 특별한 인연

 

시안에는 대안탑과 소안탑이 있는데 모두 기러기 '안(雁)'자를 쓰고 있다. 이 탑들은 기러기와 어떤 관련이 있기에 탑 이름에 기러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현지 가이드들로부터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현장법사가 눈 덮인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중 사막에서 그만 길을 잃고 헤매는데 염불을 외우자 하늘에서 기러기 두 마리가 날아와 길을 안내해 주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대안탑과 소안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석가모니가 수행 중 배고픔에 허덕일 때 하늘에서 기러기가 떨어졌는데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러기를 땅에 묻어주고 그곳에 안탑(雁塔)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굶주림 속에서도 그릇된 생각을 하지 않았던 석가의 수행을 기리기 위해 현장법사도 대안탑을 세웠다는 얘기다.

 

또 다른 하나는 자은사에 탑을 짓는 공사를 하던 중 하늘에서 갑자기 기러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 어린 승려가 그 기러기의 털을 뽑아 구워 먹으려 하자 현장법사는 '석가모니의 사자로 길 잃은 나를 도와준 기러기를 어찌 구워 먹으려 하느냐'고 꾸짖고 죽은 기러기를 위해 탑 이름을 대안탑으로 했다는 얘기였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두보(杜甫)가 대안탑에 올라 썼다는 유명한 시 <동제공자은사탑(同諸公登慈恩寺塔)>에도 기러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부근에 많은 기러기들이 살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대안탑에서 그려보는 옛 장안의 모습은?

 

자은사 경내를 지나 대안탑에 오르려는데 들어서는 입구에 검게 그을린 조각상들이 예사롭지 않아 소개된 안내판을 보니 당 고종이 쓴 <술삼장성교서기(述三藏聖敎序記)> 비문을 당대의 대서예가 저수량(褚遂良)이 쓴 것이라고 되어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대안탑을 오르는 것은 구도의 길에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제일 높은 7층, 64m 높이에 올라서자 시안의 마천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안은 원래 동서 10km, 남북 9km 성곽에, 총 110개의 직사각형으로 체계적인 도시형태를 유지했다고 하는데 당말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현재 시안은 명나라 홍무 7년에서 11년(1374-1378년) 사이에 축조된 높이 12m, 너비 15m, 둘레 11.9km의 성곽으로 당시의 1/6 규모로 축소된 것이다.

 

당대 시안(장안)의 인구는 7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그야말로 '세계의 수도'로 불릴 규모였다. 당은 당시 48개국과 교역을 했으며 29개국은 조공을 바쳤고 6개국은 국토를 바쳤으며 귀속된 나라가 5개의 나라였다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산도 강도 없는 드넓은 황토평야만이 황량하게 펼쳐져 있을 뿐인데 어떻게 이곳에 그 거대한 제국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한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유목문화와 주변의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폭넓게 끌어안은 포용력과 문화적 유연성이 아마도 당제국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중국문명의 거대함과 조숙함이 새삼 놀랍게 다가온다.

 

약 천 년 동안 이 근처에서 대안탑은 아마 제일 높은 건물이었겠지만 현재는 대안탑 동서남북으로 현대화된 마천루가 즐비하며 시안의 스카이라인은 여느 현대화 도시 못지않게 발전된 모습이다. 정방형으로 시원하게 뻗은 도로망은 백거이(白居易)가 시에서 읊은 것처럼 바둑판같기도 하고, 또 줄을 맞추어 심어 놓은 채소밭(家围棋局, 十二街如种菜畦)을 연상시키도 한다.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합격한 사람이 당시 제일 높은 이곳 대안탑에 올라 자신의 이름을 새겨 남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유명 관광지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풍습은 어쩜 이 대안탑이 원조인지도 모르겠다.

 

탑을 내려오는데 각층마다 종,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고 한 층에는 석가모니의 발자국 형상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열반하기 직전에 발자국을 남겼는데 인도에 갔던 현장이 그것에 예를 표하고 그려와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발자국에서 연꽃은 깨끗함을, '卍' 문양은 불과 광명을, 두 마리의 물고기는 해탈을, 병(甁)은 지혜를, 소라는 포교를, 3개의 금속은 율법의 보호를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대안탑은 과연 단순한 불경연구소였을까?  

 

대안탑 뒤로는 현장삼장원(玄奘三藏院)이 최근에 공사를 마치고 관광객에게 개방된 모양이었다. 현장법사가 불경을 구하기 위해 갔던 경로와 과정 등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 사원이다. 황제의 특명을 받고 서역 소국을 염탐한 현장의 서역(西域) 기행문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읽듯 사원을 둘러보게 된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현장이 염탐한 서역국은 대부분 불교 신봉 도시국가였고 또 곧 당나라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하니 중국은 불교를 대내적으로는 백성을 교화하는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하고 대외적으로는 주변 도시국가를 종교적으로 끌어들여 복속시키는 무기로 활용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불교는 유가와 함께 중국인들의 중요한 사유세계를 이루는 동시에 동서교역로 개척의 촉매제 역할을 했으며 또 통치자들의 그 거대한 정복 야망의 기폭제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은사 남문 앞에는 오승은이 쓴 <서유기(西遊記)> 삼장법사의 모델이 된 현장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데 뜨거운 사막을 건너고 눈 덮인 산을 넘은 고행을 이겨낸 구도자인지, 아니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불교 도시국가를 염탐한 스파이인지 그의 얼굴을 한참 올려다보게 된다.

 

멀리 사각의 낮은 체감률로 남성적인 당당함을 풍기는 대안탑은 인도에서 구해온 불경을 보관했던 곳이고 자은사는 인도의 불경을 번역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당대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주변국의 동정과 정보를 분석하고 정복 전략을 모의하던 장소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비림(碑林) 현판에 사라진 점 한 획의 의미는?

 

대안탑을 뒤로 하고 찾은 곳은 비림(碑林)이었다. 비림은 시안의 남문성곽 옆 문창문(文昌門)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 공자문묘(孔子文廟)였으나 당말 이후 비각(碑刻)들이 한데 모여 숲을 이루고 있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사각형 연못을 지나 문묘(文廟) 글귀가 새겨진 패방을 지나면 6개의 누각이 양옆으로 3개씩 도열해 섰는데 청대 여진족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 누각들 끝에 효경정(孝經亭)이 있고 그곳에 임측서(林则徐)가 썼다는 비림(碑林) 현판이 걸려 있는데 '비(碑)'자의 '田' 위에 삐침 한 획이 빠져 있다.

 

현지 가이드는 아편전쟁 이후 서양 열강이 아편 소각의 책임을 물어 흠차대신 임칙서의 파면을 요구했고 결국 임칙서는 신장(新疆)의 한직으로 쫓겨 가게 되는데 그 길에 썼기 때문에 불만의 표시로 한 획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대의 예서체에서는 '비(碑)'자의 점 한 획을 주로 생략해 썼다고 하며 불만의 표시라기보다는 농민을 상징하는 '전(田)' 위에 그 어떤 것도 억누르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생략했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그 비림 누각 안에는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가 있는데 당 현종이 주석을 한 것으로 유명하며 비석이 풍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해서체의 탁본된 글귀가 붙어 있다.

 

묵향을 맡으며 돌로 된 책 속을 거닐다

 

모기에 물려가며 제1전시관에서 제7전시관까지 약 3천여 개 비석의 숲을 둘러보는 것은 의외로 흥미롭고 유익하다. 비록 전서, 예서, 초서, 행서, 진서 등의 서체에는 문외한이지만 주역,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상서, 시경 등 한대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이 돌에 새겨진, 그 돌책 속을 은은한 탁본의 묵향을 맡으며 인문학 산책하듯 거닐게 된다.

 

'삐시(贔屭)'라는 거북이처럼 생긴 놈은 원래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를 좋아한다는데 무거운 돌덩이에 정말 더 무거운 내용의 경전들을 가득 짊어지고 드디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빙그레 웃고 있다. 역사와 학문의 무게를 소중히 간직하는 중국인들의 기록정신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비석 중에 눈여겨 볼만 한 것으로 제2전시실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있는데 비문에는 로마제국에서 이단으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교가 당나라에 전해진 과정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개방된 당나라의 풍토에서 서양의 과학문명이 전래되어 중국에서 찬란하게 꽃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수도 있었으나 중국은 그 가치를 받아들이기에 이미 너무 높고 조숙한 문명수준을 이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교의 융성 하에 10세기 이후 네스토리우스교는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이 비석 또한 버려진 체 방치되었다가 1623년 외국인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멋진 풍류가 느껴지는 관우의 댓잎 편지 '관제시죽(關帝詩竹)'

 

비문을 탁본해 판매하고 있는 제4전시실에는 재미난 언어 유희 비석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댓잎 편지로 유명한 관우(關羽)의 '관제시죽(關帝詩竹)'은 대나무 그림 속에 자신의 마음을 시로 표현한 기발한 아이디어로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관우가 조조 진영에게 붙잡혀 있으면서 변함없는 자신의 충성심을 댓잎에 숨겨 몰래 표현해냈다고 하는데 그 역사적인 사실여부를 떠나 중국인의 풍류와 멋이 한껏 배어나는 작품이다. 내용은 이렇다.

 

不謝東君意(불사동군의) 동군(조조)의 호의에 감사하지 않고丹靑獨立名(단청독립명) 붉고 푸르게 홀로 이름을 세우리니莫嫌孤葉淡(막혐고엽담) 외로운 나뭇잎(관우) 퇴색됨을 미워하지 않기를終久不凋零(종구불조령) 끝내 시들어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청대 마덕소(马德昭)가 그렸다는 '집자두성점두도(集字魁星点斗圖)'는 한 발은 뛰어난 능력을 나타내는 거북이(鰲)를 밟고 다른 한 발로는 하늘의 북두칠성(魁星)을 떠받들고 있는, 과거시험 급제자들의 학문하는 자세를 형상화한 비석이다. 그림 속에 '정심수신 극기복례(正心修身 克己復禮)' 8글자가 숨어 있다는데 아무리 봐도 '身'자 외에는 어떤 글자도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이 밖에도 목숨 '수(壽)'자를 구십구(九十九)와 이십일(廿一)을 합하여 120세까지의 천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일필휘지하였는데 빼어난 서체에 감탄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다.

 

무(武)보다 문(文)이 숭상되던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하나의 경전은 그야말로 귀중한 보물이었고 그것을 소실되지 않게 보관하겠다는 의지는 거대한 돌덩이들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록을 남겨놓은 셈이다. 그리고 그것의 탁본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배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수없이 회자되며 사상의 깊이를 더해 갔을 것이다.

 

전시실을 나오자 야외에는 말을 매던 돌로 된 말뚝들이 모여 있는 전마장(栓馬桩)이 있는데 민간에까지 얼마나 예술적인 분위기가 널리 보급되어 있는지를 잘 엿볼 수 있다. 그곳에서 그림을 파는 중국인은 한국관광객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고 하는데 곧잘 우리말을 한다.

 

그러나 그 종업원은 여선생님들 '아줌마'라고 불렀다가 여선생님들로부터 일장연설을 듣고 다음부터는 연령고하를 막론하고 여자는 무조건 '아가씨'라고 부르겠다고 다짐을 하여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박정주선생님은 제4전시실에서 150위엔 하던 관우의 댓잎 편지 탁본을 비림 밖 상점에서 60위엔에 사 오셨는데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차에 오르느라 그 탁본을 사지 못한 나는 두고두고 아쉬워해야만 했다.

 

낡은 기차 타고 시안을 떠나다

 

시안역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토요일이고 '8과 9' 모두 길한 수라서 식당에서는 또 결혼식이 치러진 모양이다. 올림픽개막일인 8월 8일 결혼증서 등록을 마치고 오늘과 내일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다더니 정말 시안 시내 여기 저기 결혼식 차량들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안역에서 또 귀찮은 짐 검사를 마치고 충칭(重慶)행 기차에 오르려는데 기차가 참 가관이다. 녹색옷을 입은 이 기차는 정말 석탄연료를 연소시켜 가는지 뿌연 연기가 푹푹 나고 낡을 대로 낡은 열차다.

 

중국 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들고 잉쭈어(硬座,딱딱한 좌석)칸으로 들어가려는데 역무원이 제지를 한다. 객실 내에서도 담배를 피우고 웃옷을 벗은 그 중국 서민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연기 속에서도 미동도 없이 승객들의 좌석 위치를 안내하는 객차 승무원이 있어 얘기를 나눠보니 성은 주(朱)이고 스물두 살이라고 한다. 그녀는 서안 근처에 사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째 열차 승무원일을 하고 있다.

 

일은 3일 근무에 3일 휴무고 근무는 8시간씩 번갈아 가면서 한다고 한다. 밤새 흔들리는 열차에서 일하는 것이 힘들지만 대학에 다니는 남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일을 해야 한다며 언제쯤 '흔들리는 기차 위의 인생'이 끝날지는 기약이 없다며 웃어 보인다.

 

야근을 할 때는 남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하는데 주(朱)승무원이 밤새 우리를 위해 복무해주는 동안 기차는 친링(秦嶺)산맥의 무수한 터널을 지나 연수단 일행을 충칭의 아침에 내려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8월5일~14일까지 중국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태그:#대안탑, #비림, #관제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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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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