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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 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신명순 작사. 김희갑 작곡)

대학로의 두 가지 상징을 말하라면 하나는 마로니에 공원이요, 또 하나는 다양한 무대작품들이 하루에도 수십 편씩 오르내리는 대학로 소극장들이라 할 것입니다. 마로니에 공원의 마로니에는 아직 피고 지고 있지만, 대학로 소극장에선 연극이 사라지고 있다는 탄식이 들립니다.

대형뮤지컬에 치이고, '개그콘서트'와 '웃찾사' 류의 가벼운 개그 공연에 밀려 대학로에서 연극의 설 자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4년 만에 돌아온 <연극 열전 2>가 고군분투하곤 있지만, 그 역시 '연극' 자체에 대한 관심에 앞서 스타캐스팅의 후광을 업고 있다는 비판에 부딪혀 있습니다.

앞으로 [숨소리 극장] 연재를 통해 연극을 조금이라도 더 비싼 가격에 판매하려는 이들이 득세하는 속에서도, 관객과 호흡하고 우리 사회와 호흡하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숨어 있는 좋은 연극과 뮤지컬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기자의 말

오프-대학로의 숨은 진주.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공연 포스터
▲ 연극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 공연 포스터
ⓒ 극단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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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브로드웨이의 지나친 상업성을 우려하는 예술인들이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와 오프-오프-브로드웨이(Off-Off-Broadway)를 만들어 새로운 문화운동을 모색했습니다. 비록 자발적이고 발전적인 모색이라기보단 치솟는 대학로 공연장 임대료를 견디다 못해 쫓겨나듯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우리에게도 오프-브로드웨이와 비교되는 오프-대학로 공간이 몇 해 전 선을 보였습니다.

혜화역에서 5분 거리. 혜화로터리 북쪽의 우암길을 중심으로 게릴라 극장, 동숭무대, 혜화동 1번지, 연우 소극장 등 쟁쟁한 극단의 소극장이 이곳 오프-대학로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오프-대학로의 젊은 피 선돌극장에서 '젊은 극장에서 젊은 공연 보기 기획공연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작, 연출 손기호)>입니다.

복 받아 가이소

경북 경주의 작은 읍내 감포. 문무왕의 대왕릉이 있는 것 말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 보잘 것 없는 마을에 더욱 보잘것없는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하반신을 못 쓰는 어머니 분이, 반편이 아들 열수, 앞 못 보는 며느리 덕이.
시장통에서 채소를 팔아 연명하는 이 세 식구는 저마다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뚱이의 아픔은 물론 가슴 속 깊이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이들은 인연과 악연. 짓이겨진 욕망과 감추어진 비밀. 용서와 화해로 서로를 감싸 안으며 살아갑니다.
핵폐기장 유치로 사람들의 욕망이 얽히고설키는 감포. 과연 이곳에 대왕릉의 불빛은 축복을 내려 줄는지요?

시납시스만 읽으며 상당히 어렵고 무거운 극일 거란 예감이 듭니다. 허나 답부터 들려 드리자면 '절대 아니다'입니다. 웃고 즐기고 가슴 아파하는 동안 두 시간이 언제 지났는지 모를 만큼 극에 몰입합니다. 웃음과 눈물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관객들은 두 시간 동안 감정의 바이킹을 탑니다. 무거운 얘기도 자연스레 표현하는 손기호 연출의 힘입니다.

배우들은 또 어떤가요. 손기호 연출이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극은 배우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이야기할 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일품입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분이(우미화 분), 그악스런 말투와 몸짓으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 미천(염혜란 분), 상처를 깊이 숨기고 살아가는 눈먼 덕이(장정애 분), 실제 시골 촌부처럼 자연스런 삶이 녹아있는 농담을 건네는 따뜻한 단 씨(윤상화 분). 등장하는 배우 열한 명 모두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조화로운 연기를 선사합니다.

커튼콜 시간이 짧다고 느낄 정도로 좋은 공연을 선사합니다.
▲ 공연이 끝난 <감포사는 분이, 덕이, 열수>의 무대모습 커튼콜 시간이 짧다고 느낄 정도로 좋은 공연을 선사합니다.
ⓒ 손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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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같은 시장통에서 물건을 하나 팔고 나면 분이네 세 식구는 손님을 향해 외칩니다.
"복 받아 가이소."

공연은 16일까지입니다. 이 기사를 보시는 당신도 공연장을 찾으셔서 분이, 덕이, 열수 가족이 주는 복의 세례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꼭.

남의 기억과 마음을 빌려 쓰는 사람 <임차인>

공연포스터
▲ 연극 <임차인> 공연포스터
ⓒ 극단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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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고(故) 윤영선 극작가의 추모제 형식으로(페스티벌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추모하기보단 축제처럼 즐기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열리는 '윤영선 페스티벌'의 세 번째 작품이자 윤영선 극작가의 유작인 <임차인>입니다.

1) 2층 집: 2층 집에 이사 온 첫날, 집주인 중년여성이 출입문에 서서 내려가지 않고 입주한 미혼여성에게 자기의 젊은 날의 꿈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2)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통스런 가족문제를 손님에게 얘기하며 그의 조언을 바란다.
3) 바닷가에서: 낮에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오다 낯선 사내와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남편, 낯선 곳에서 정착하기 위해 고민하는 부인.
4) 동행: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여자, 밤길에 동행하는 남자, 결국 그 남자는 그녀 집에서 키우던 개로 밝혀지고... (극단 파티 <임차인> 소갯글 중 발췌.)

죽기 며칠 전 '나무윤영선꽃'으로 개명한 작가가 생전에 좋아하던 보드카와 담배가 놓여져 있다.
▲ 故 윤영선 극작가의 분향소 죽기 며칠 전 '나무윤영선꽃'으로 개명한 작가가 생전에 좋아하던 보드카와 담배가 놓여져 있다.
ⓒ 손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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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이야기를 옴니버스식 형태로 구성한 <임차인>은 '삶의 회의, 잃어버린 추억,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 이. 대화를 나눌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사람의 거리,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늘 저것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부부. 간절하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소통하고자 하지만 끝내 무엇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익숙한 김내하씨와 <마파도>의 길해연씨. 그리고 진경, 신덕호, 강진휘, 윤소현 등 탄탄한 실력의 배우들이 펼치는 꽉 찬 무대와 고(故) 윤영선 극작가 특유의 생략과 은유가 빛나는 무게감 있는 대사들이 한층 감동의 깊이를 더합니다.

더불어 공연이 펼쳐지는 정보소극장의 플로어에는 고(故) 윤영선 극작가의 간이 분향소가 설치되어 있고, 그를 기리는 이들이 작게 사진전을 펼치고 있어 그 의미를 더합니다.

정보소극장의 플로어에서 열리고 있는 윤영선 사진전을 관람하는 관객들.
▲ 나무가 되고 싶었던 극작가 <윤영선 사진展> 정보소극장의 플로어에서 열리고 있는 윤영선 사진전을 관람하는 관객들.
ⓒ 손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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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감포 사는 분이, 덕이, 열수] 16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 (문의 02-747-3226 )

[임차인] 9일까지 대학로 정보소극장. (문의 02-744-7304)



태그:#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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