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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예쁘게 담아 냅니다.
 떡을 예쁘게 담아 냅니다.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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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유만주란 양반이 있었는데 이런 글을 남기셨지. 들어보게. '저택에 사치를 부리면 귀신이 엿보고, 먹고 마시는 데 사치를 부리면 신체에 해를 끼치며, 그릇이나 의복에 사치를 부리면 고아한 품위를 망가뜨린다'."- 김영하의 <퀴즈쇼> 54쪽


처음 서울에 직장을 구했을 때는, 요리에 '요'자도 음식에 '음'자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했기에, 시장에 있는 그릇가게에 가서 밥 그릇 하나 1000원, 국 그릇 하나 2000원, 숟가락 젓가락 한 쌍을 1000원에 장만했습니다.

반찬 그릇 같은 것은 사지도 않았습니다. 주인집 할머니께서 오래되어서 안 쓴다는 그릇들을 한 무더기 넘기셨거든요. 주인 할머니는 또 아주 오래된 낡은 자개가 붙어 있는, 상다리가 잘 접혀지지도 않는 까만 밥상도 주셨는데, 그것도 넉넉히 두 해는 썼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면 비닐봉지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집에서 역시나 반찬을 만들어 큼직한 플라스틱 통에 넣어 보내면, 그대로 상에 올려놓고 먹었습니다. 따로 덜어 먹어야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을 먹었고 그래서 배만 채워준다면, 그게 어떤 음식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정체불명의 음식도 그냥 맛있으면 그만이었죠. 1000원짜리 싸구려 소시지가 왜 입에 착착 감기는지 몰랐고, 화학첨가물이니, 환경호르몬이니 하는 낱말이 지구상이 있는 낱말인지도 몰랐습니다.

집에서 만든 쿠키
 집에서 만든 쿠키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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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길 몇 년. 그러나 동생이 아프면서 모든 것들이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아픈 동생이 어떤 음식을 먹어야하는지, 어떤 음식이 우리 몸에 맞고 좋은 음식인지 책도 읽어보고 인터넷도 뒤져보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음식에 무관심하고 무모했는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음식을 보는 눈도 점차 달라지고, 음식을 대하는 생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부작용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요리하는 카페나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게 되다보니, 견물생심이라고 눈에 보이니 갖고 싶은 마음이 솔솔 솟아났습니다. 드디어 지름신이 인터넷을 타고 저에게 강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헉, 아니 세상에, 어떻게 밥상을 저렇게 예쁘게 차려 먹을 수 있는 거야? 저 그릇들 진짜 해도 해도 너무 예쁜 거 아냐? 샐러드는 저런데 담아먹으니 역시 폼이 나는군. 헉, 찌개를 냄비 째 밥상에 안올리고 세상에나, 다른 큰 그릇에 다시 옮겨 먹는다고? 우와, 커피를 커피잔에 타 먹으니깐 진짜 뭐가 다르군. 머그잔이 다가 아니었어. 역시 생선은 네모난 접시에 담아야 해. 고추장 종지가 정말 예쁘군. 뭐야, 저 카레를 밥 위에 바로 안 붓고 따로 소스 그릇에 담는 단 말이야? 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오른손 검지는 끊임없이 마우스 버튼을 딸깍이며 화면을 이동시킵니다. 눈은 화려하게 펼쳐진 그릇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렇게 서서히 저는 그릇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1000원짜리 밥그릇과 2000원짜리 국그릇과 나이 드신 할머니도 오래되어서 안 쓴다는 그릇에 만족하며 살았던 제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만 것이었습니다.

홍차
 홍차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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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마트에 가면 그릇코너에서 어슬렁어슬렁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시장에 있는 그릇가게에 가서 울적한 마음을 풀곤 했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에, 이런 저런 재질에 이런 저런 그릇들을 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싹 사라졌습니다. 외국으로 여행을 가도 무거운 가방 들고 다니기 싫어 작은 배낭 하나 메고 갔던 제가, 이젠 그릇 사 올 생각에 가방을 챙기고, 여행지에서 쇼핑을 해도 그릇부터 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비싼 가방도 많고, 비싼 보석도 많고, 비싼 옷도 많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비싼 그릇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그릇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릇이 좋아진 것이지, 비싼 그릇이 좋아진 것이 아니니까요. 풀색 이파리가 그릇 가장자리를 따라 그려져 있는 그 그릇이 나도 참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무리해서 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1000원 주고 산 스텐레스 쟁반에 집에서 만든 쿠키를 담고, 1000원쯤 주고 산 작은 그릇에 떡을 담고, 5000원쯤 주고 산 그릇에 고등어를 담고 역시나 5000원쯤 주고 산 잔에 홍차를 담고,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 게 제가 그릇 쇼핑을 하는 이유니까요.

고등어
 고등어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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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여전히 이런 저런 그릇에 눈독을 들입니다. 한식을 담으면 정말 예쁠 그릇을 4인용 정도로 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 그릇을 놔둘 곳이 없네요. 물론 돈도 없지만요.

그릇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음식이 사랑이겠죠. 요리는 나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나의 노력과 정성을 쏟는 것이니 만큼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예쁜 그릇에 담아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비오는 날 부추전이라도 하나 구워서 프라이팬째로 밥상에 올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널따란 쟁반에 올려서 밥상에 올리는 것이 사실 더 낫잖아요?

내가 사고 싶은 그릇을 사려면, 내가 좋아하는 그릇들을 사려면, 그만큼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집에 불러 같이 밥을 먹고, 차라도 한 잔 해야 할 테니, 그러려면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해야겠지요. 그릇을 사려면, 사랑을 키워야 하나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쇼핑 중독> 응모글



태그:#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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