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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만든 슬픈 역사이다.
▲ 전시된 삐라들 전쟁과 이데올로기가 만든 슬픈 역사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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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의 일이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하루를 보냈던 시절이었다. 반공이 국시였고, 학교 미술 시간이면 북한군을 괴뢰군이라 하여 뿔 달린 도깨비를 그렸다. 뿔은 하나를 그릴 때도 있고 두 개를 그릴 때도 있었다. 김일성을 그릴 때면 얼굴은 없고 엄청나게 큰 혹만 그렸다.

어린 시절 딱지를 접거나 도배지로 사용했던 삐라

도깨비 뿔이나 혹만 그리면 끝나는 반공 포스터는 그림에 소질이 없던 내게도 세상 어느 그림보다 그리기 쉬운 그림이었다. 도깨비 그림을 그린 것은 중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다.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되는 크레용은 '빨강'이었다. 어떨 때는 빨강 크레용 하나로만 그림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유독 빨강 크레용이 많이 쓰이던 시절, 세상에는 '간첩'이라는 말과 '무장공비'라는 말이 어린 동심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동시에 마을에 사는 누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면 그는 어김없이 어디론가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병석에 누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그 시절 남자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정신없이 산을 헤매다 보면 대형 풍선이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가지에 걸려 찢겨진 풍선도 있었고, 벌집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풍선도 있었다.

아이들은 풍선을 차지하기 위해 몸싸움도 마다 하지 않았다. 풍선은 이리저리 찢겨 아이들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 풍선에 들어 있던 것은 말로만 듣던 '삐라'였다. 학교도 파출소도 없는 마을이라 삐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산에서 주운 삐라로 개딱지를 접었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삐라는 훌륭한 딱지를 만들어냈다. 어떤 집은 삐라로 방안을 도배하기도 했고, 글을 모르던 어른들은 삐라에 봉초 담배를 말아 피우기도 했다. 그 시절 삐라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노태우 정권 때의 삐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장한다.
▲ 북한이 뿌린 삐라 노태우 정권 때의 삐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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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하지 않으면 '큰일'날 물건이라 차라리 못 본 척

읍내에서 살게 되면서 삐라는 신고하지 않으면 '큰일' 날 물건이었다. 그때부터 삐라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것을 주워 파출소에 가져 가면 공책이나 책받침 또는 30cm 자를 주기도 했으나 그 일도 만만치 않아 차라리 삐라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떤 아이들은 파출소에서 주는 것을 받기 위해 삐라를 찾아 나섰지만 나는 그것이 행여나 집에 묻어올까 싶어 두려웠다. 간첩 신고와 함께 반드시 신고해야 할 삐라는 '즉시'가 아니면 늘 위험한 물건에 불과했다. 그런 이유로 가끔은 산에 올랐다가도 삐라를 보면 줍기보다 못 본 척 외면한 적도 많았다.  

빨갱이보다 빨간색이 더 무섭던 시절, 페인트 작업을 하던 곳을 지나던 내게 빨간 페인트가 쏟아졌다. 순간 내 옷은 붉게 물들었고, 나는 그 옷을 그냥 버리지도 못해 땅에 파묻었다. 어린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빨강의 공포를 지워내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고약한 시절이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갈 즈음 삐라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삐라에 적힌 내용만 읽어도 세상의 관심이 어떤 곳에 있는지, 북한이 남한 사회에 어떻게 간섭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순진하게도 삐라는 북한에서만 남한으로 보내는 줄 알았다. 내가 살던 곳에서 발견한 삐라는 북한에서 보낸 것들 일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남한도 북한으로 삐라를 보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군에 입대해 전방에 배치되고 난 후였다.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뿌린 삐라로 심리전술용이다.
▲ 연합군이 뿌린 삐라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뿌린 삐라로 심리전술용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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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도 보내

전방에는 북한에서 보낸 삐라보다 남한에서 보낸 삐라가 더 많았다.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넘어가야 할 삐라가 남쪽 지역으로 북서풍을 타고 역류한 것들이었다. 적게는 수십 장이 포개져 있었고, 많게는 수천 장이 산자락에 깔려 있었다. 문구만 다르지 북한에서 보낸 것들과 비슷했다.

월북한 군인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대동강변을 거니는 사진과 함께 '월북하면 사병급은 1억원이 넘고 장성급은 최소 3억원이 넘는다'라는 글귀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북한 삐라나, 귀순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진을 실은 남한 삐라나 그 수준은 돗진갯진이었다. 

'삐라'는 '전단'의 일본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살포되기 시작한 삐라의 역사. 그 역사만 거슬러 올라가도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을 짐작할 수 있으며 미·중·소 등의 주변국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정립이 될 정도다.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를 지나 냉전과 좌우의 이념대립이 만들어낸 삐라는 심리전의 일환으로 즐겨 쓰였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때는 물론이고 빨치산을 토벌할 때도 삐라가 뿌려졌고, 울진·삼척 지역에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도 삐라가 뿌려졌다.

삐라 한 장이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항공기에서 살포한 삐라에 'safe conduct pass'와 '안전보장증명서'라는 문구가 들어 있기도 했다. 그렇게 뿌려진 삐라를 들고 투항한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심리전에서의 성공이 곧 작전의 성공으로 직결되었다.

전쟁과 이념 대결의 장에서 사용되었던 삐라였지만 요즘은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삐라를 신고하면 학용품을 주던 불온선전물 처리 규칙이 2007년 10월에 폐지되었으니 이젠 기념품으로 한 장씩 보관한다고 해도 겁나지 않을 세상이 되었다.

운명은 그대 손에 있다! 남한에서 북한군에게 뿌린 삐라.
▲ 주검과 삶 운명은 그대 손에 있다! 남한에서 북한군에게 뿌린 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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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의 추억을 되살려내는 '추억의 박물관'

그래서일까. 그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삐라가 추억의 대상이 되었단다. 강원도 정선아리랑학교에서 운영하는 '추억의 박물관'에서 개관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작지만 의미있는 기획전을 마련했는데 '삐라의 추억'이 바로 그것이다.

전시는 지난 4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이번에 전시된 삐라는 100여장. 6월 30일까지 매달 전시된 삐라를 교체한단다. 삐라를 한 번에 전시하지 못하는 것은 전시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추억의 박물관은 각종 자료를 상설 전시를 하고 있어 공간을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전시된 삐라는 오래전 보았음 직한 것들도 있지만, 처음 보는 것들도 많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보낸 삐라도 있고, 연합군이나 남한에서 북한으로 보낸 삐라도 있다. 삐라만 보아도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사료적인 가치도 높다.

전시 코너에는 '중공군에게 뿌린 삐라'와 '북한으로 보낸 삐라',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뿌린 삐라', '연합군이 뿌린 삐라', '대통령 비방 삐라', '팀스피리트 훈련 중에 미군이 뿌린 삐라', '광복의 기쁨이 적힌 전단' 등이 시기와 사안별·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삐라는 '삐라가 이렇게 다양할 수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재와 내용이 다양하다.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도 있고, 눈물을 쏟게 만드는 그림과 문구도 있다. 삐라에 적힌 달콤한 손길은 그 유혹을 거부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정치적인 삐라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5공 세력이 되살아난다'라는 카툰도 있다.

삐라의 변천사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전시된 삐라는 광복 후부터 한국전쟁, 1960년대와 70년대, 가장 최근의 것은 김영삼 대통령을 비방한 삐라까지 있다. 아직도 공개하지 않은 삐라를 감안한다면, 삐라가 교체 전시되는 다음 달이 기다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것인가. 연합군이 중공군에게 뿌린 삐라이다.
▲ 선택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갈 것인가. 연합군이 중공군에게 뿌린 삐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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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항하면 신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안전보장증서이다.
▲ 연합군이 중공군에게 뿌린 삐라 투항하면 신분을 보장해 주겠다는 안전보장증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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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역사의 산증인이자 내용증명

현대사에서 삐라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떠한지 궁금해진다면 '추억의 박물관'을 즐겨찾기 해둘 만하다. 아이들에게는 역사의 현장이며, 어른들에게는 불행한 역사의 산증인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40대를 넘긴 사람치고 한 번쯤 삐라를 주워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주운 삐라를 들고 파출소로 달려가던가 아니면 그것을 어쩌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던 일은 이제 우리의 아픈 추억이 되었다. 분단된 우리 민족이 겪어온 서러운 '내용증명'이 추억의 박물관에서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이들을 기다린다.

추억의 박물관에 가면 기획전인 '삐라의 추억' 말고도 볼 것이 많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추억의 물건들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현대사에서 버려졌던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가득하다. 꼼꼼하게 둘러보면 두어 시간은 족히 걸릴 정도로 전시된 추억이 많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소장품 중에서 십분의 일에 불과해요. 전시 공간이 좁은 관계로 한 번에 전시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이유로 추억의 박물관은 이번 전시가 끝나면 올해 폐교가 된 정선의 오대천변에 있는 숙암초등학교로 옮긴다. 교실 다섯 칸을 가진 폐교라 전시 공간이 그나마 넉넉해질 듯 싶다. 추억의 박물관 진용선 관장은 "오대천은 아름다운 곳입니다. 내년 쯤이면 추억의 박물관이 계곡과 물, 정선아리랑이 어우러진 박물관으로 거듭 날겁니다" 라고 말했다.

주말을 맞아 아이들에겐 역사를, 어른들은 아픈 기억과 아련한 추억을 더듬어 보기 위해 정선아라리의 고장인 정선으로 떠나봄이 어떨까 싶다. 소박하지만 귀한 '삐라'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 듯싶다.

노태우 정권이 5공 세력의 부활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는 그림으로 북한이 뿌린 삐라이다.
▲ 5공 세력이 되살아난다 노태우 정권이 5공 세력의 부활에 바람을 불어 넣고 있는 그림으로 북한이 뿌린 삐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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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진정한 친구는 국제연합이다.
▲ 연합군이 뿌린 삐라 당신의 진정한 친구는 국제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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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추억의 박물관 / 전화 033-378-7856 / 웹사이트 www.ararlan.com / 전시기간 4월 5일~6월 30일



태그:#삐라, #심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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