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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기보다는 차라리 서글프도록 진지한 모습이다. 장딴지까지 푹푹 빠지는 고래실 논에서 한 자락의 벼라도 더 건져내겠다고 낫질을 하고 있는 시골 아낙의 모습은 챙기거나 거둬들이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책임을 지겠다는 숭고함이다.

기계조차도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으니 지금이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땅이 되어 있지만 그 옛날, 모내기라도 하려면 하늘을 바라보며 비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예전엔 물 걱정 없이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상답 중의 상답이 고래실이었다.

어딘가에 샘이 있어 1년 365일 물 걱정 없는 게 고래실이지만 푹푹 빠지는 수렁도 있게 마련이니 대부분이 기계를 사용하는 요즘에도 고래실 농사만큼은 사람이 짓고 사람이 거둬야 한다.

그런 고래실에서 시골 아낙이 벼 베기를 한다. 사람에 비해 수백 배는 힘도 세고 일도 잘하는 멀쩡한 콤바인을 저만치 세워놓고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진흙 논에서 낫질을 하고 있다.

 

 

빠지기만 하는 게 아니다. 바람에 쓰러진 벼들이 다리미로 다려놓은 듯 납작납작 바닥에 깔려 있으니 한 포기 한 포기를 일궈 세우며 낫질을 하고 있는 모습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허리 지끈거린다. 어떤 벼 포기에서는 주르르 물이 흘러내리고, 어떤 벼 포기에는 덕지덕지 논바닥 흙이 묻어나오니 벼 베기를 하는 아낙의 손길은 더디기만 하다.


반쯤은 썩어 있을 것 같은 벼 몇 단 더 건져낸다고 뭐를 챙길 것이 있으며, 남을 것이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뚝뚝 땀방울을 흘려가며 봄부터 키워낸 곡물, 자식을 키우듯 그렇게 지은 농사이기에 안 됐다고, 거둬들이기에 힘들다고 나 몰라라 외면할 수 없어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은 벼 베기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모리배처럼 이문만 쫓는 마음이었다면 그냥 내팽개치거나 벌써 갈아엎었을 거다. 땅을 섬기고 하늘을 위하며 지은 농사이기에 잘못된 자식이 더 안쓰러운 부모처럼 어떻게든 결실로 이어가려고 구부정한 허리를 툭툭 두드려가며 거두고 있으니 고단해 보이지만 염치 있는 모습이다.


이게 바로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이다. 하찮을지라도 당신이 뿌린 씨앗은 당신의 손으로 거둬들이는 진솔한 모습이니 참으로 몰염치해진 세상에 작은 희망이 되는 진솔한 모습이며 염치를 돌아보게 하는 옹달샘이다.

 

세상은 요지경, 사람들은 몰염치

 

요지경 속 세상이 얼마나 몰염치해졌는가? 세상을 판치는 몰염치 때문에 웬만한 파렴치쯤은 기죽지 않아도 될 듯싶다. 당장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적당한 염치없음 정도는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거리가 수두룩하게 생겼다.

 

 

남자가 50줄 나이로 들어서면 이래저래 고개를 숙이게 된다고 한다. 직장에서는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이 버겁고, 혹시라도 있을 구조조정 대상자가 되지 않을까를 걱정하며 자리에 연연해야 하니 이래저래 눈치를 살피느라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고 한다.


직장에서만 그런 게 아니란다. 부부생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잠자리에서도 예전만큼 씩씩(?)하지 못하니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되니 은근히 고개가 수그러진다고 한다니 이런 것들이 가장으로 살아가는 남자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며 서글픈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어느 연예인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잠자리에서만큼은 기죽을 이유도 고개 숙일 이유도 절대 없다. 11년을 살면서 부부관계를 10여 번 정도밖에 갖지 않았다고 했으니 일 년에 한 번 꼴도 안 되는 수다. 제아무리 나이를 먹고 체력이 달려도 최소한 그보다는 더 많이 사랑하고 부부관계를 가질 수 있을 테니 수그러지던 고개를 빳빳하게 세울 거리가 생긴 거다.

 

 

파렴치한 세상이 될까봐 걱정되지만 자신의 허물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면 이불 속 이야기까지 거리낌 없이 꺼내놓을 만큼 몰염치한 세상이 되었으니 더 이상 부끄러워할 게 없는 몰염치한 세상 아닌가?


뿐만이 아니다.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라면 몇 번쯤 위장전입은 별것이 아닐 것 같은 세상, 이런저런 의혹이 따르더라도 오리발만 내밀면 떳떳해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을 차떼기로 오염시켜 놓아도 몇 년이라는 시간만 지나면 다시금 떳떳해질 수 있는 게 대한민국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얼마쯤은 탈법을 해도 부끄럽지 않은 당연한 일로 떳떳하게 큰소리를 쳐도 될 것 같다는 착각에 작은 실수나 범법 정도엔 용감(?)해야 된다고 생각되니 작금의 세상이 어지럽고 다가오는 미래가 가소롭다.

 

▲ 아낙은 벼 베기 중 장딴지까지 푹푹 빠지는 고래실논에서 한 자락의 벼라도 더 건져내겠다고 낫질을 하고 있는 시골아낙의 모습은 챙기거나 거둬들이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책임을 지겠다는 숭고함이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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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염치한 지도자들이 판치는 세상은 필부들의 생각과 범부들의 가치조차 몰염치하게 만든다. 이래저래 몰염치해져가는 요즘에 두 눈에 비친 시골 아낙, 장딴지까지 푹푹 빠지는 고래실 논에서 한 자락의 벼라도 더 건져내겠다고 낫질을 하고 있는 시골 아낙의 모습은 눈에 들어간 티끌을 불어내는 맑은 바람이다.


위정을 부르짖고 위민을 떠들어대기 전에 고래실에서 벼 한 포기를 건져 올리는 아낙의 마음이 되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누가 아닌 자신을 돌아보며 헛웃음일지언정 허공에 대고 크게 한번 웃어본다.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왠지 허전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컴팩트 카메라도 찍어 동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습니다.


태그:#고래실, #몰염치, #요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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