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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 처음 봤어요. 으히히.”
“히용님! 히용님! 우리나라보다 더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 여기 있어요. 히히히.”


오늘은 내가 일하는 안산센터와 같은 단체 소속인 광주센터와 함께 연합으로 여행을 가는 날. 얼추 버스 세 대가 꽉 들어찼다. 중국인들이 탄 버스가 한 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친구들이 한 대. 러시아와 기타 다국적 친구들이 그 나머지를 이루었다.

나에게 늘 “히용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방글라데시 안주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님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도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다며 늘 맞지도 않는 발음으로 “히용님! 히용님!” 한다.

우리말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하고 워낙 부지런하기도 해서, 어느 공장에 가도 사장님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공장에서 인정을 받으며 적응을 잘해서 그간 벌어놓은 돈도 꽤 된다. 고향에도 넉넉히 쓸 만큼 충분한 돈도 보내고 이젠 어느 정도 한국생활을 즐기는 것 같다.

경주를 거쳐 거제도로 3박 4일 여행을 가는 동안, 거의 1년만에 만난 나를 졸졸 쫓아오며 내내 수다를 떨고 있다.

“아니 그런데 누구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잖아요. 저 뚱뚱한 아저씨!”


예브게니
 예브게니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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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으로 앞머리를 밀어올리며 대머리흉내를 내고 있다. 분명 몰도바에서 온 아저씨 ‘예브게니’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더 못 살다니요? 무슨 뜻이에요?”

한국말을 워낙 잘해서 농담과 우스갯소리까지 유창하게 할 정도라, 난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하면서 적당히 대꾸를 해주는 척한다.

“아까 저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몰도바에서 왔대요? 몰도바는 우리나라보다 더 못 살아요. 으히히. 난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 처음 봤네.”

“설마 예브게니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아니죠? 하지 마요. 기분 안 좋아할 거예요. 그리고 잘 살 건 못 살 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방글라데시나 몰도바나 그렇게 못 사는 나라는 아니잖아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대충 이렇게 이야기하고는 대화를 닫았다. 그동안 한국사람들에게서 ‘방글라데시 너희 나라 되게 못살지!’란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주눅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

“몰도바? 우와! 거기 진짜 유명한 관광지잖아요!”

예브게니가 우리 사무실을 처음 찾은 이유는 회사에서 임금을 받지 못해 상담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크라이나 친구 빅토르의 안내로 우리 사무실을 알게 되었다. 3개월치 월급이 밀려 있었다. 회사는 부도가 나 있었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돈도 없을 정도로 사정이 딱했다.

몇 주간의 추적 끝에 회사의 사장은 다른 도시로 회사를 옮겼고, 회사는 운영이 잘 되며 넉넉히 돌아가고 있었다. 회사로 찾아간 예브게니를 보고 사장님은 적지 않게 놀랐지만,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밀린 월급을 받아낼 수 있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처음에 상담을 시작할 때 상담카드라는 것을 작성해야 한다. 우리말과 영어, 그리고 중국어로 되어 있다. 주말에는 상담이 많아져서 자원봉사자들이 빠른 속도로 외국인노동자들을 옆에 앉혀놓고 상담카드를 작성한다.

“예브게니. 어느 나라예요?”
“몰도바!”

“예? 몰도바요? 진짜예요? 우와~! 거기 환상적인 곳이잖아요? 그런 데서도 한국에 일하러 와요?”

이제 갓 대학에 들어온 신출내기 풋풋한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상담을 하다 말고 막 흥분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차 소장님. 이분 몰도바에서 오셨대요. 와 정말 부럽다.”
“어 정말요? 와 대단하시네요. 거기 바다가 끝내준다던데요.”


순간 예브게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는 바다라는 단어를 모른다 싶어서 “바다. S. E. A. 바다”라고 연거푸 단어를 반복했다. 이렇게 ‘신기한’ 나라에서 온 분은 처음이라서 자원봉사자들이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주위를 에둘렀다.

“아니. 아니. 우리 없어. 바다. 노(no) 바다.”

주먹에 딱 맞는 크기의 한국어 사전을 왼손에 붙잡은 채 떠듬거리며 우리말을 나열식으로 이야기한다.

바다가 없다니. 가끔 인터넷을 떠돌며 여행객들이 남긴 매혹적인 비취색 해안 바다를 바라보며 부러움으로 사무실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뿜어내는 곳. 거기가 몰도바 아니었나?


“나 몰도바. 엄… 나의… 나라… 엄… 있어. 옆에. 루마니아.”
“아~! 몰도바! 몰디브가 아니고 몰도바라잖아. 몰도바.”


몰도바
 몰도바

잠시 후에야 우리는 예브게니의 고향이 몰디브 제도가 아니라 유럽에 있는 나라 몰도바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 예브게니는 몰도바에서 왔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어느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못사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뭐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에 외국인노동자로 일을 하러 왔으니, 우리나라보다 더 잘사는 나라는 아닌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싶다(그런데 가끔 잘 사는 나라에서 오기도 한다).

시원스럽게 벗겨진 대머리. 진한 갈색 선글라스를 끼고 스웨터를 벗어서 팔 부분을 칭칭 감아서 목에 두르고 적당히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채 원곡동 주택사거리를 거닐 줄 아는, 예브게니는 멋쟁이다.

상담 일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인데, 유독 러시아권에서 오신 분들은 생활의 곤궁을 떠나서 멋을 낼 줄 아는 사람들인 것 같다. 상담소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행을 가든, 오페라 관람을 가든, 콘서트를 가든 진짜 그 분위기에 심취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몰도바 출신인 예브게니는 없는 형편에 겨우겨우 돈을 만들어 루마니아와 독일에서 조그마한 사업과 무역을 했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나이는 50세. 오래 전에 이혼을 했다.

예브게니는 쉼터에 산다. 오갈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가 가진 돈도 없으니 우리 쉼터에 들어와서 살라고 했더니 바로 다음날 짐을 싸서 들어온다. 우리 쉼터는 모두 중국인들 위주라, 같이 섞여서 생활하게 하면 따돌림을 받을 것 같아서 독방을 주었다.

그런 예브게니. 그런데 자꾸 여기 채이고 저기에 채인다. 뭐든지 ‘쪽수’로 밀어붙이는 성향이 있는 중국인들은 은근슬쩍 예브게니를 무시하기도 하고, 아예 대놓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누가 소문을 내기라도 했는지, 쉼터에 드나드는 외국인노동자들이 예브게니의 고향이 몰도바라고 하면 ‘아, 유럽에 있는 진짜 못사는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적잖이 예브게니를 언짢게 한다.

“저. 왔어요. 루마니아에서.”

이제 쉼터 생활 1년째. 그동안 한국말도 서투르지만 단어 위주로 조금 배웠다. 한국말에 존칭이 존재해서, 반말을 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도 특별히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젠 여기저기 시달리다 보니 여러 가지 처세술을 통달했다. 존칭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아예 대놓고 나라를 속인다.

“아저씨, 어디서 왔어요?”

새로이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분들. 혹은 우리 센터에 의료봉사를 오시는 분들. 일자리를 구하러 오는 사장님들. 그리고 외국인노동자들. 이분들이 물을 때마다 예브게니는 이제 이렇게 대답한다.

“저. 왔어요. 루마니아에서. 알아요? 루마니아. 당신.”
“네. 잘 알아요. 루마니아. 거기 스포츠도 잘하고. 아~! 유럽에서 왔구나. 기회 되면 동유럽 여행 가고 싶네요.”


옆에서 듣고 있는 나를 보며 살짝 윙크를 보낸다. 루마니아나 몰도바나 어느 나라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적어도 우리 상담소에서는 말이지. 하지만 ‘루마니아에요’라고 했을 때와 ‘몰도바에요’라고 했을 때 돌아오는 그 집요한 질문의 차이를 오래도록 느끼다 보니 예브게니는 이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예브게니와 러시아에서 오신 친구분들과 함께 이번에는 경복궁을 찾았다. 한 달에 한 번 어김없이 이들과 함께 서울이건 지방이건 여행을 가든지, 콘서트를 가든지 한다. 정취를 감상할 줄 알고,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떠나는 여행은 언제든지 기쁘고 즐겁다.

예브게니는 경회루 앞 벤치에 앉아서 떠나질 않는다.

“여기. 지폐에 새겨진 곳이에요. 알아요? 만 원짜리.”

나는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들고 자랑스럽게 경회루를 가리켰다.

“오, 예쁘다. 한국. 예쁘다. 많이 많이. 몰도바. 아! 많아요. 먼지.”

또 다시 예브게니의 몰도바 비난이 시작된다. 사업을 하는데 마피아들이 와서 매일같이 돈을 다 강탈해간다는 등. 한국은 사업하기 좋은 나라라서 부럽다는 등. 푸념 섞인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바람인즉,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자신의 고향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고 돌아가셨으면 좋겠다. 사업 자금도 두둑이 마련해서 돌아가서 가게라도 하나 내면 얼마나 좋을까?

몰도바는 외국인노동자들이 가족에게 송금하는 돈이 국가운영의 핵심 기반 중 하나이다. 아직은 유럽에서 가장 못 사는 최빈국. 러시아에서 석유 등 자원들을 수입해서 쓰다 보니 늘 강대국에 시달리는 나라. 어서 몰도바 사람들이 유럽의 강호들 틈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당당히 ‘우리 몰도바다. 너희 우리 무시했냐?’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 지나 호기심에 혹시나 해서 인터넷 웹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예브게니! 몰도바가 어떻게 잘 되어가고 있는지 한번 볼까요?”

몰도바 2005년 1인당 GNP $2119 (141위)
방글라데시 2005년 1인당 GNP $2011 (143위)


몰도바가 방글라데시를 젖혔다.

“너희 지금 몰도바 무시하니, 무시하니?”


태그:#이주노동자, #몰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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