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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태양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나의 애마 로페카(Ropeca). 애리조나 사막.
 작열하는 태양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나의 애마 로페카(Ropeca). 애리조나 사막.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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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댁에 속을 썩이는 자녀가 있습니까? 아니면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제자는요? 직장 상사나 부하, 얄미운 동료나 친구가 있는지…. 그렇다면 친절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애리조나 사막 한 복판에 떨궈 놓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너무 매몰차지 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자전거 한 대와 힘내라는 격려 한 마디는 던져주고 말이죠.

여행은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사람과 사물을 통해 대체로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 유쾌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모험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여행과 동일한 선상에서 때로는 더 큰 파이를 차지하는 부정적 자극마저 자신에게 유익이 되게끔 만드는 훈련과정이지요. 여행은 있는 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게 초점이라면 모험은 없는 것도 창조적으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북극 여행이 아닌 북극 모험이듯이….

사실 애리조나 사막을 달리기에 앞서 바로 이러한 고민이 두뇌세포 하나하나에 주입되어 숨이 턱 막혀 왔습니다. 사막이 뭐 별거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물이나 태양 등 인간의 생태적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들에 대한 한계를 극복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을 떠나온 초심의 마음을 묵상해 봅니다.

젊음과 열정만으로 성공할 순 없지만 젊음과 열정이 있기에 포기할 수는 없다.
 젊음과 열정만으로 성공할 순 없지만 젊음과 열정이 있기에 포기할 수는 없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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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젊습니다. 젊음이란 말에 편안함이란 단어를 연결시키지 말자고 늘 다짐하던 나입니다. 게다가 고무적인 점은 구제불능 낙천주의와 함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모험심이 이미 사막 한 가운데 긍정의 우물을 파 놓았다는 것입니다. 황금대지 위에 생명의 숨결을 토해내는 사막 라이딩. 그 짜릿한 환희를 생각하노라니 고운 그녀를 만나러 가는 설렘만큼이나 입이 바싹바싹 마릅니다. 그러니 어찌 사막을 앞에 두고 양반걸음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망상과 로망을 가지고 진입한 애리조나 사막. 그러나 상큼하게 시작된 페달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행의 수련으로 변모합니다. 훈풍은 열풍으로 바뀌고,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인간의 고통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듯 양기 가득한 저주를 뿜어냅니다. 오로지 한 길로만 가는 상황에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빠르게 빠져 나가는 것의 의의지, 나 참.'

작가 삐에르 쌍소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느리게 사는 법>을 읽는다면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울화통이 터질게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지극히 물리적인 애정이 필요합니다. '사랑해'라는 말로 다가오는 친구보다 물, 얼음, 수박, 아이스크림 따위를 던져주는 원수가 더 눈에 밟힐 게 뻔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한참을 달려도 한 쪽만 쌍꺼풀 진 바람기 그득한 눈엔 도무지 보이는 게 없습니다. 주유소(Gas station)도 없고, 레스토랑도 없습니다. 사람의 냄새도 들꽃의 향기도 모두 증발되어 버린 이곳은 고요한 악마의 안식처입니다. 그리고 난 천사라고 매우 고의적인 착각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결코 이곳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지 말입니다.

사람이 극도로 몰리는 상황이 되면 오히려 모든 걸 해탈하고 유유자적이 되는가 봅니다. 도무지 사람의 흔적에 닿을 낌새가 보이지 않자 오후 느지막이 아예 자전거에서 내려옵니다. 애마 로페카(Ropeca)와 종속관계가 아닌 수평관계로 길을 헤치기 위함입니다. 해거름이 되면서 날씨가 겨우 한 풀 꺾여 이젠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 바람에 노래나 실어 보낼까 청승맞게 흥얼거려 봅니다. 콜라 중독 때문에 목이 관리되지 않아 삑소리가 나지만 인상만큼은 톱가수 못지않습니다.

'하늘이여 나를 도와 줘 그렇게 울고 있지 말고 내 님이 있는 곳 너는 쉽게 알 수 있잖아.'

아, 남이라도 좋으니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배도 슬슬 고파오고, 무슨 배짱으로 음식은 또 그리 부실하게 쌌는지 후회가 됩니다. 별 수 없이 물배를 채우고 또 나그네마냥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래도 이런 착오와 경험들이 축적되어 나중에 아프리카 사막에 도전하게 되겠지요.

인디언 아이들 시즌 1. 갖가지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이 귀엽다.
 인디언 아이들 시즌 1. 갖가지 포즈를 취하는 아이들이 귀엽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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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아이들 시즌2. 총대신 나무막대기로 군인 역할을 자청하는 아이들.
 인디언 아이들 시즌2. 총대신 나무막대기로 군인 역할을 자청하는 아이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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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아 네월아 아스팔트 도로 위 한 점 고독한 시인이 되어갈 무렵 차량 한 대가 멈춰섭니다. 옳다구나 싶습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디 가려고?"
"케이옌타(Kayenta)요! 보시다시피 자전거 여행 중입니다."
"그래? 케이옌타까진 머니 내 차에 실어. 앞으로 30km는 더 가야 돼."

하루 내내 80km 넘게 달려왔는데 아직도 30km 남았다니요. 원채 목표를 위한 얍삽한 타협을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어차피 소생, 유연함을 배우러 나온 여행길 아니겠습니까? 조용히 자전거를 그의 트럭에 얹혔습니다. 비굴한 타협이었지만 사막의 로망이고 뭐고 일단 살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차를 세우셨어요?"
"어, 그래? 알았어."

"엥? 아니 왜 차를 세우셨나고요. 저보고 세우신거에요?"
"응? 좋아!"

아이쿠! 뭔가 분위기가 요상합니다.

"음, 집은 어디세요? 일마치고 가시는 길이에요?"
"그래, 고마워."

환하게 웃으며 동문서답을 하는 그는 늙은 나바호 인디언입니다. 처음 대화가 통하길래 아무것도 눈치를 채지 못했는데 그는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선 연신 웃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되레 그 모습이 더 친근해 보이던걸요.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구나. 언어로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만큼보다 더 세밀한 사람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언어가 가지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새삼 평범한 진리를 바깥에서 나와 겪어보니 또다른 감흥이 밀려옵니다. 사람들은 내 표정에서 어떤 마음이 느껴질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득 보여지고 느껴지기에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잠시 고글을 벗어 천으로 닦은 후 거무튀튀한 얼굴을 비춰봅니다.

'음…. 표정관리도 좋지만 피부관리부터 해야겠군.'

나바호 인디언들의 주식. 토틸라(Tortilla)와 감자, 당근, 소고기, 옥수수 등이 들어간 비프수프
 나바호 인디언들의 주식. 토틸라(Tortilla)와 감자, 당근, 소고기, 옥수수 등이 들어간 비프수프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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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에 도착한 케이옌타에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일단 만만한 경찰서부터 찾기로 했습니다.

"저기요 실례합니다만 경찰서가 어딘가요?"
"경찰서요? 저 쪽으로 가면 있을껍니다. 반 마일 정도."

주유 중에 있는 인디언 남자에게 물었더니 경찰서가 위치한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창한 영어로 대답해 줍니다. 그리고 경찰서 찾기를 10여분. 방향감각을 잃어버려서인지 여전히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트럭이 크랙션을 울리며 저에게 신호를 보내옵니다. 다가가서 보니 아까 친절히 대답해 준 그 친구입니다.

"경찰서 아직 못 찾았어요?"
"네. 밤이라 잘 안 보이네요."

"그런데 왜 경찰서로 가려고 그래요?"
"아, 오늘 잘 곳이 마땅찮아 경찰서에서 정보를 좀 얻거나 뭐 안 되면 그냥 거기서 자려구요. 주변에 딱히 텐트 칠만한 곳도 안 보이고."

이 친구, 내 말을 듣더니 잠깐 부인과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묻습니다.
"당신,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 알아요?"

우왓! 모뉴먼트 밸리? 모뉴먼트 밸리라면 그 유명한 나바호 인디언의 성지이자 자전거 여행가 이시다 유스케가 그 장엄한 광경에 도취되어 3일 간이나 머물렀다는 그 장소 아닙니까. 나 역시 내심 벼르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모뉴먼트 밸리 소리에 마치 귀한 손님을 만나듯이 감정의 기어를 급속히 올린 나는 단번에 외쳤습니다.

"모뉴먼트 밸리요? 당연히 알죠!"
"우리집이 그 쪽 근처에요. 여기에서 북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곳이죠. 서진하는 것 같던데 괜찮다면 오늘 밤 우리 집에서 묵고 갈래요? 내일은 제가 모뉴먼트 밸리와 주변 구경시켜 드릴께요."

현대 문명을 받아들이는 나바호 인디언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전기와 물 없이 생활하는 가정들도 있다.
 현대 문명을 받아들이는 나바호 인디언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전기와 물 없이 생활하는 가정들도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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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를 대접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그의 눈과 나그네 좀 대접해 주십사 강력히 갈망하는 제 눈의 접촉점에 두 사나이의 마음은 통하고 있습니다. 문명의 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차를 타는 인디언과 문명의 이기를 소극적으로 밀어내며 자전거를 타는 동양인의 대화.

쉽게 보기 힘든 장면에 그도 나도 낯설지만 이 생경스러운 만남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잠시 주유소에서 짧은 질문과 대답을 나눈 것뿐인 우연으로 스쳐 지날 그와 나 사이에 지금 인연의 꽃이 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 이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애리조나 사막에 얄미운 사람을 떨궈 놓자는 당초 취지는 잠시 유보해 두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자전거, #미국횡단,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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