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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있는 황거. 일왕이 거주하는 황거에는 내시가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일본 도쿄에 있는 황거. 일왕이 거주하는 황거에는 내시가 없었고 지금도 없다.
ⓒ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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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에 존재한 내시가 일본에는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동아시아권인데도 그런 차이가 생긴 것은 왜일까? 혹시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위와 같이, 내시가 있고 없고 하는 차이의 원인을 문화적 혹은 지리적인 데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으로는 문제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정치적 측면에서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보다 더 명확하리라 본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한 정치집단이 막부(바쿠후)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세기 초반부터는 가마쿠라막부가, 14세기 초반부터는 무로마치막부가, 17세기 초반부터는 도쿠가와막부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상징적인 존재였던 '천황'이 내시의 출현을 막아

그리고 막부의 권력은 일왕의 권력을 능가했다. 막부는 일왕의 권위를 능가하지는 못했지만 그 권력만큼은 능가할 수 있었다. 일왕은 권위는 있지만 권력은 없는 존재였다. 소위 ‘천황’이라는 표현처럼, 일왕의 권력은 그저 천(天)에 붕 떠 있는 권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와 같이 왕권을 절대적으로 능가하는 신권이 있었다는 데에서, 일본에 내시가 없었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쇼군(막부의 지도자)을 비롯한 무사계급의 위력에 억눌린 일왕으로서는 내시라는 최측근 보위집단을 거느릴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내시란 본래 왕권이 신권을 능가하거나 혹은 왕권과 신권이 대립을 보이는 정치체제에서 왕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존재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처럼 아예 왕권이 신권 앞에서 무기력한 경우에는 왕도 내시를 둘 엄두를 못 내고 신하들 역시 왕이 그런 시도를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사실, 한 남자가 자신의 ‘양물’을 제거하면서까지 다른 남자를 주군으로 모시려면, 평생 의지하고 충성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그 남자가 강력하고 믿을 만해야 한다. 그런데 군주가 막부 쇼군 앞에서 쩔쩔 맨다면, 남자들은 쇼군에게로 몰려들지 일왕에게로 몰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거한다 해도, 쇼군을 위해서 제거하지 일왕을 위해서 제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에 비해 한국과 중국에는 비교적 강력한 왕권이 존재했기에, 군주들이 내시를 통해 관료집단이나 귀족집단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런 강력한 왕권이 있었기에, 자신의 ‘양물’을 제거함으로써 생기는 손해보다는 이익이 더 크다고 계산하는 남자들도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일본에는 궁중 남자들의 정치적 보좌를 받아야 할 만큼의 강력한 왕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시제도가 처음부터 불필요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세신궁의 내궁. 이곳에서는 왕실의 조상이자 일본의 건국식으로 인식되는 아마데라스오미가미를 모시고 있다. 왕실 신격화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이세신궁의 내궁. 이곳에서는 왕실의 조상이자 일본의 건국식으로 인식되는 아마데라스오미가미를 모시고 있다. 왕실 신격화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 이세신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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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본 왕과 왕실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을 보호했을까? 아무리 형식적이라 해도 그래도 왕은 왕인데, 대체 어떤 노하우가 있었기에 그 오랜 기간 동안 혁명도 당하지 않으면서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일왕의 신격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46년 1월 1일 히로히토 당시 일왕이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하는 소위 ‘인간선언’을 하기까지 일왕은 일본사회에서 일종의 신과 같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왕은 백성들 위에 신으로서 군림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권좌에 대한 정치적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천황은 신격화되었기 때문에 왕조를 유지했다

일왕 신격화 작업이 낳은 정치적 효과를 들라면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신격화 논리의 전파를 통해 일본 왕실은 왕조교체에 필요한 혁명이론의 대두를 차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념적으로 신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에서 정치세력을 동원해서 왕조를 바꾸려면, 상당히 정치하고 세련된 이념적 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또 일왕이 자신을 신격화시키면서 ‘인간의 영역’(현실 정치)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의 영역’을 통치하는 막부가 왕실을 따로 견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일왕과 막부 간에 모종의 타협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한국이나 중국에도 천명사상이 있어서 왕권을 보호하기는 했지만, 일본처럼 국왕이 직접 자기 자신을 신으로 자처하는 예는 별로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의 군주들은 그저 ‘신의 대리인’ 정도를 자처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일왕은 신의 대리인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비록 내시 같은 존재들의 도움은 없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왕조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시를 둘 만큼의 정치적 권력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일본이 한·중에 비해 군주권이 약했지만, 신의 대리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본이 한·중에 비해 정치적 기술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 왕실은 굵고 짧았다면, 일본 왕실은 가늘고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한·중만큼의 강력한 왕권이 없었기 때문에 내시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왕실은 내시가 없는 대신 한·중의 천명사상보다도 더 강력한 신격화 사상을 전파하는 데에 성공하여 오랫동안 왕실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태그:#왕과 나, #내시, #일왕, #막부,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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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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