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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예비경선 결과가 5일 오후 발표된다. 9명의 예비후보 가운데 4명의 후보는 탈락하고, 5명이 본경선에 진출하게 된다. 이를 위해 3~4일 이틀 동안 전화 여론조사가 실시된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9명의 민주신당 대선 예비후보 지지자들이 밝히는 '지지 이유'를 이틀에 걸쳐 소개한다. 1차로 3일에는 손학규·정동영·한명숙·추미애·신기남 후보를 소개한다. 이어 4일에는 이해찬·유시민·천정배·김두관 후보를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나는 정치가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난 20대에 가지고 있었던 꿈을 잃지 않았다. 보다 나은,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던져왔다. 그 과정에서 먼저 죽은 사람도 있고, 다친 사람도 있고, 출세해서 변한 사람도 있고 아직도 변함없이 현장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마음속에 간직했던 것은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꿈을 이루자는 것이었고 근본적인 변화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혁명가였다. 모두들 생활인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옛날의 동지들도 모두 마음속에는 그 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생활인으로서 바쁜 친구들과 내가 다른 것은 나는 어느 순간에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것이고 정치판에서 성공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본 적이 없다.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4번을 실패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길 위에 있다. 나는 아직도 혁명가인지도 모른다.

 

신기남은 나의 이상을 받아주었고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나는 그를 신당 창당과정에서 만났다. 모두가 주저할 때도 곧은 심지를 보였던 그는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겼다.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은 민주당탈당파, 개혁당 등 시민사회 활동가, 그리고 한나라당을 나온 독수리 5형제가 함께 모이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개혁당 등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모이는 첫 회의를 소집한 사람이었고 그 모임이 점점 커져 신당연대가 되었고 결국은 민주당을 뛰쳐나온 사람들과 함께 우리당을 창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신기남 의원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 민주당 의원으로서 신당창당의 의의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데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했다. '회군론'을 펴면서 흔들리는 민주당 소속의 다른 국회의원과 달리 그는 일관된 말과 행동으로 신뢰를 주었고 그런 그에 대해 나는 큰 매력을 느꼈다.

 

총선 과정에서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국회의원 경선에는 떨어졌지만 당의 중앙위원으로서 당 운영에 대한 모든 최종결정에 참여하였다. 보스가 사라진 최초의 정당에서 중앙위원회는 토론과 투표를 통하여 모든 결정을 자유롭게 했던 장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민주화 투쟁의 가치를 공천과 당 운영에 반영시키고자 가장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신기남이었다. 아니 사실상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열린우리당 공천심사 과정에서 민주화운동 경력밖에 없는 사람은 자격이 없어서 배제시켜야 한다는 논리에 맞서, 오직 그것밖에 없는 인사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홀로 주장하고 관철시킨 상임중앙위원이었다.

 

궁금했다. 민주투사도 아니었던 그는 왜 민주개혁의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 그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당의장 선거에 낙선한 뒤였다.

 

그는 왜 민주개혁의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가 안타까웠다. 당의장에서 선친문제로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물러난 것도 안타까웠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라고 모두 알지도 못할뿐더러 아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에 누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사퇴했다지만 나는 나쁜 선례라고 생각했다. 잘 나가던 정치인이, 선친문제만 빼면 아무런 하자가 없던 한 정치인이 그 문제 때문에 재기에 실패하고만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내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방문했을 때, 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인상 깊었다. 가끔씩 만나게 될 일이 생겼고,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답했다. “당신이 당의장에 다시 도전하려고 했던 이유는 실용주의란 이름으로 당을 보수화시키려는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인데 좌절하지 마시고 당의 정체성을 살리는 투쟁을 계속합시다.”

 

그래서 이어진 것이 신진보주의란 기치를 내건 '신진보연대'의 결성이었다.

 

나는 우리가 80년대에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가치는 변함없지만 변화된 세상에 맞게 방법과 수단을 새로이 세워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세계화, 지식정보화, 자유화란 물결에 우리의 진보적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같이 탐구하고 현실에 제출하고 우리당 내에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같이 싸워보자고 모인 것이 '신진보연대'다. 신기남은 새로운 진보주의가 우리 사회와 우리당에 꼭 필요한 노선이라고 확신하며 우리와 함께 했다.

 

신기남은 참 낙천적인 사람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편하게 생각하며 원칙대로 풀어왔다. 그는 성장과정에서 부유하지도 않았고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마음이 풍요로웠고, 바로 그 점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최대의 장점이다.

 

진정한 혁명가는 낙천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신기남에게도 혁명가와 같은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다.

 

신기남이란 인물은 분명 가치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묻고 싶다. 그가 아버지 문제 말고 무슨 흠이 있는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친일파였다는 자극적인 기사거리 말고 그에게 도대체 무슨 흠결이 있는가?

 

나는 그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운동권 출신의 낡은 진보주의자들이 경종을 느낄 수 있도록, 살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진보한 사람의 성공을, 새로운 진보의 성공을 보고 싶다.

 

솔직히 나 또한 무디어져 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분노는 나의 안락함이 대신하고 있고 때때로 내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일은 아닌지 한탄하며 술을 벗하곤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며... 기초생활 수급권자의 암담함을 접하며... 나는 지금 내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자책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힘을 불어 넣어주는 것은, 역사에 대한 신념보다, 민중에 대한 애정보다, 더 큰 채찍질을 나에게 가하는 것은 부끄러운 고백일 수 있지만, 신기남의 꿋꿋함이었다.


나는 신기남 후보가, 나날이 진보하는 정치인 신기남 동지가 가치있는 정치인으로 개혁진영의 중심으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럴 때 한국정치가 더 한층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진보의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대한민국도 진보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함운경은 1964년 3월에 태어나 전북 군산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을 맡아 민족통일, 민중해방, 민주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청년이 되었다. 

1985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상 촉구를 위해서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했다. 이후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와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한국청년연합회 활동 등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노무현과 함께하는 전북 사람들' 대표와 개혁신당추진 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창당에 기여했으나, 국회의원, 군산시장 등 4차례의 선거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셨다. 


태그:#신기남, #민주신당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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