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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피랍사건 발생 이후 처음으로 한국언론이 직접 촬영한 현지 영상이 31일부터 각 방송사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 동안 현지 취재를 막아왔던 정부가 피랍자들의 석방이 모두 확인된 직후 한국언론사 풀(대표취재) 기자단의 아프간 입국을 허용, 현지 취재가 이뤄진 것이다.

 

YTN이 이날 오후 7시경 가장 먼저 '카불에서 지금 막 들어온 화면'이라며 석방된 피랍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장면을 내보냈다. 이를 보고 있던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피랍자들과 함께 세레나 호텔에 들어서는 김만복 국정원장의 모습이 스치듯 화면에 비췄기 때문.

 

김 원장이 현지에 가있다는 것을 모르기도 했지만, '음지'에서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정보기관의 장이 세계의 이목이 쏠린 그 '민감한'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건 골치 아픈 방송사고구나'란 느낌이 퍼뜩 들었다.

 

김 원장은 정부가 현지대책본부장으로 파견한 박인국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장 바로 앞에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옆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탈레반과의 협상 타결 후 한국측 협상대표로 카메라 앞에 모습을 나타냈던 그 '선글라스 맨’'임을 알 수 있었다. YTN 보도에서는 김 원장의 출현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국정원 공보실에 전화를 걸어 김 원장이 카불에 간데 대한 설명을 요청했다. 국정원측은 답변을 망설였다.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8시가 훨씬 지나서야 회신이 왔다. "공식적으로 해명하지 않겠다"는 답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KBS가 8시에 시작하는 2TV 뉴스에서 김 원장의 아프간 방문 사실을 화면과 함께 보도했다고 한다. 나는 그 시간대에 SBS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이에 관한 보도가 없었다.

 

이어진 KBS 1TV 9시뉴스를 보고서야 국정원 측이 왜 그렇게 대응했는지를 알게 됐다. 김 원장은 실수로 화면에 비춰진 게 아니었다. 호텔에 들어서는 모습은 물론 피랍자들을 위로하는 장면과 호텔로비에서 휴대전화로 어딘가와 연락을 취하는 분주한 모습까지, 작심하고 TV카메라 앞에 나타난 게 분명했다.

 

테러단체인 탈레반과의 협상을 한국 정보기관의 수장이 직접 지휘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확인해준 것이다. 그 동안 정부가 신원을 공식 확인하지 않고 있던 한국 협상대표 '선글라스 맨'의 소속도 스스로 공개한 셈이다.

 

국정원, 탈레반과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이번 인질구출 과정에서 국정원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물론 상식적으로 국정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란 짐작은 한다. 외교통상부에 대책본부가 설치되긴 했지만, 테러대책은 역시 국정원 소관이다. '순환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외교통상부엔 탈레반을 상대로 직접 협상을 벌일 만큼 현지어에 능통한 외교관이 없다. 반면 국정원 해외파트 요원들은 평생 한 지역, 한 언어만을 파고든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색을 내야 그걸 알아준다고 생각했을까? 정부가 이번 사건에서 인명구조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 총력을 다해 탈레반과 직접협상을 벌인 것 자체를 나무라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시선은 다르다.

 

한국정부가 '테러집단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국제사회의 불문율을 깼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탈레반 측에 ‘몸값’을 지불했다는 보도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국외교에 고스란히 부담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라면 '국내'만 바라봐선 안될 상황이다.

 

누구를 위한 사진 공개인가?

 

사태 중반 상황이 악화되면서 정부가 어쩔 수 없이 탈레반과의 대면접촉에 나섰을 때 외교부로부터 한 통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탈레반과 우리 정부간 협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탈레반과 우리측간 협상'이라고 바꿔달라는 것이었다. 형식논리로라도 '정부'가 직접 협상에 나서지 않았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였다.

 

외교부 당국자는 31일 오후까지도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는 탈레반과 직접 협상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명구출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협상전문가를 고용해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구해낸 것이다. 협상전문가의 신원은 확인해줄 수 없다".

 

물론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직접협상'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외교에는 그런 '모호성'이 필요하고, 그것이 통하기도 한다.

 

그런데 김 원장은 석방된 인질 두 명을 사이에 두고 이 '고용된 협상전문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카불 풀 기자단을 통해 이를 공개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스스로 완전히 퇴로를 차단한 꼴이다. 도대체 어떤 목적에서 누가 보라고 찍은 사진일까?

 

김 원장이 직접 현지에 가서 협상을 지휘해 19명의 소중한 인명을 구해온 노고를 조금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마무리 과정에서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태그:#김만복, #국정원장, #선그라스 맨, #탈레반, #아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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