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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드코시 강 위에 매달린 하늘 브릿지를 건너 남체로.
ⓒ 이평수

4월 4일 수요일 맑음
남체(Namche Bazaar, 3450m) ⇒ 풍기덴가(Phunki Drenka, 3250m) ⇒ 텡보체(Tengboche, 3860m)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셀파들의 고향인 남체를 떠나 텡보체로 향한다. 하늘은 맑고 스쳐가는 풍경에 가슴이 설렌다. 길은 멀지만 굴곡이 많지 않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두 모퉁이를 돌자 텡보체 사원 뒤로 에베레스트(Everest, 8848m)와 로체(Lhotse, 8516m), 그리고 그 오른편에 아마다블람(Amadablam, 6812m)이 한눈에 펼쳐진다.

많은 트레커와 원정대원, 그리고 짐을 나르는 야크들로 좁은 길이 부산하다. 해발 3250m의 풍기덴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은 네팔의 라면인 라라. 지난 겨울 이곳에 눈이 적게 내렸나 보다! 예전엔 맑은 물이 흘러 마나차를 돌리곤 했는데, 그래서 그 맑은 물에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씻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강수량이 적어 마나차가 돌지 않는다.

여기서 텡보체까지는 해발 600미터를 올라야 하는 급경사다. 대원들도, 포터들도, 야크들도 모두 힘든 모양이다. 풍기덴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야크 한 마리가 힘겨워 주저앉고 만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 했던가! 이곳의 야크가 정녕 그러하다. 척박한 이곳의 밭을 갈고, 그토록 모진 매를 맞아가며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나무가 없는 이곳에서 그 변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연료로, 그러다 죽어선 주인에게 고기와 가죽을 주는…. 하여, 이곳 사람들의 재산목록 1호는 야크임이 분명하리라.

오후 4시경 텡보체에 도착했다. 예정했던 디우체에 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텡보체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해발 3860m의 텡보체…. 쿰부 지역에서 가장 큰 사원, 텡보체사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안개에 살포시 가려진 텡보체사원은 엄숙한 그 뭔가를 느끼게 한다. 새벽을, 기나긴 이곳의 새벽을 뒤척일 것 같아 몇 잔의 창(막걸리)을 들이켜고 침낭 속으로 몸을 숨겼다.

4월 5일 목요일 오전 맑음
텡보체(Tengboche, 3860m) ⇒ 페리체(Pheriche, 4280m)

어제 밤늦게까지 남체부터 우리 짐을 날랐던 포터들이 하산해 버리고 말았다. 원인이야 임금이겠지만, 너무 과하게 요구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그렇게 주고 나면 다음 원정대에게도 똑같이 과한 임금을 요구할 게 틀림없다.

페리체로 향하는 중 탕보체사원에 들러 라마승을 만나 우리 등반의 안전 기원을 부탁하며 다소의 돈을, 가지고 온 카타에 싸서 정성스레 라마승에게 건넸다. 그는 쉼 없이 불경을 외며 간간히 우리에게 쌀을 뿌리곤 했다. 엄숙한 의식은 한 시간이나 진행됐다.

의식의 마지막에 라마승은 대원들 각자의 이름이 적힌 카드 한 장을 쌀과 함께 봉투에 넣어 주었다. 카드는 정상에 가기 전날 펼쳐서 에베레스트 여신에게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봉투에 든 쌀은 위험에 처했을 때 뿌리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뭔가 대단한 걸 얻은 것처럼 상기된 기분으로 봉투를 받아 정성스레 가슴에 품고 사원을 나섰다.

낮 12시, 소마레(Chomare)에서 감자와 툭바(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한참을 더 기다려도 이평수 대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오후면 찾아드는 안개와 바람 때문에 한기가 느껴졌다. 조금은 빠른 걸음을 재촉하며 페리체로 향했다. 저 언덕만 넘으면 페리체…. 페리체를 목전에 둔 이름 모를 롯지에 들러서 차와 창을 청했다.

안주로 내놓은 비스킷은 만든 지가 3년이 지난…. 이제 갓 돌을 지난 남아와 갓 스물을 넘겼을 것 같은 엄마. 애기 아빠는 셀파로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다고 한다. 애기가 크면 셀파로 키울 것이라고 애기 엄마는 당당히 얘기한다. 20년 후 내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다시 이곳을 등반한다면 지금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저 녀석과 함께 등반할지도 모를 일이다. 로지를 떠나 차가운 바람과 안개 속을 30분가량 걸어 페리체에 도착했다.

▲ 지구 최고봉 에베레스트.
ⓒ 이평수

4월 6일 금요일 오전 맑음
페리체(Pheriche, 4280m) ⇒ 투글라(Tuglha, 4620m) ⇒ 로부제(Lobuche, 4910m) ⇒ 페리체(Pheriche, 4280m)

지금까지의 카라반 중 가장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 4000m 이상의 고소에서 이날 하루만 약 700m의 고도를 올려야 하니 말이다. 페리체의 평원은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인다. 여기저기 한가히 풀을 뜯는 야크와 넉넉한 모습의 트레커와 더없이 높고 맑은 하늘…. 발걸음도 참으로 가볍다.

투글라에서 간단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기착지인 로부제로….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게 로부제에 도착했다. 오후 늦게 전 대원이 로부제에 도착했다. 유독 윤종철 대원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인다. 갈지자로 걷는가 하면 눈동자 역시 정상이 아니다.

고민 끝에 사다와 함께 페리체로 하산시키기로 했다.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20시, 키친보이 치링이 황급히 내게 달려왔다. 깐차(막내, 이석희)가 심하게 아프다는 것이다. 상태를 확인해 보니 복통과 두동이 심하다는 것이다. 일단 급성고산병을 의심하고 다이아목스와 시베리움을 먹이고 한 시간이 지나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하산시키기로 했다.

21시,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페리체로 하산하기로 했다. 10분을 걷다 5분을 쉬기를 반복했다. 내려가야 할 길은 먼데 석희의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다. 급기야 이젠 더 이상 못 가겠다며 누워버린다. 쉴 때면 석희는 어김없이 졸곤 했다. 업기도 하고, 치링과 함께 석희를 부축하며 새벽 2시가 다 돼서야 페리체에 도착했다. 통상적인 고산병은 700m의 고도를 낮추면 상태가 나아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석희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밤새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4월 7일 토요일 오전 맑음, 오후 바람, 눈
페리체(Pheriche, 4280m)

오전 7시 30분 아직 페리체 병원은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으나 비상벨을 눌러 의사를 깨웠다. 의사는 석희의 상태를 살피며 복부가스와 맹장이 의심된다고 한다. 둘 중 어떤 증세인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으나 맹장이 의심스러우니 빨리 헬기를 불러 카트만두로 후송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반면 여의사는 맹장이 아니라고 한다. 급성고산병이니 내려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한다. 3일 정도 쉬면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누구 말이 옳은지…. 그도 그럴 것이 변변한 진찰기구 하나 없으니 그럴 수밖에, 고작해야 청진기 하나밖에 없으니….

그러던 차에 우연히 옆 롯지에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팀 닥터였던 조대행 선배님이 계셨다. 선배님께 석희의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해 줄 것을 부탁했다. 선배님 역시 맹장을 의심했다. 긴급히 카트만두에 있는 왕추셀파에게 전화해서 구조헬기를 띄워줄 것을 요청했다.

로부제에 있던 김창호 대원과 이평수 대원이 긴급히 페리체로 하산했다. 석희의 보호자로 이평수 대원을 함께 카트만두로 하산시킬 계획이었다. 11시에 온다는 헬기는 12시가 돼서도 오지 않는다.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구름이 밀려오기 때문에 아무리 구조헬기라도 오후에는 뜨지 않는다.

12시가 넘자 구름은 점점 더 짙어지고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12시 30분 드디어 저 멀리서 헬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이평수 대원과 석희를 헬기에 태우자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려고 한다. 아무 일 없어야 될 텐데…. 여의사 말대로 차라리 급성고산병이어야 할 텐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래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자! 헬기를 보내고 이제 윤종철 대원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점심으로 77 에베레스트 선배님 팀에서 비빔국수를 준비해 주셨다. 석희에 대해 여러모로 걱정해주시니 너무도 고맙다.

롯지로 돌아와 김창호 대원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안주 삼아 창을 마셨다. 오후 3시 30분 김창호 대원과 사다 도로지, 치링은 로부제로 복귀하기로 하고, 나와 윤종철 대원은 내일 로부제로 향하기로 했다. 김창호 대원 일행이 로부제를 향해 페리체를 떠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밤늦게까지 눈은 그치지 않았고 롯지 주인인 라마는 세 통의 창을 더 내왔다.

태그:#등반, #에베레스트, #로체, #맹장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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