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한미FTA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요즈음 한미FTA 관련 전문가들이 매우 고군분투하고 있다. 정보가 차단된 악조건 속에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과 논리를 제공하는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5월에 협정문이 공개되면 황우석 사건보다 수십 배 더 강력한 역전드라마가 펼쳐질 것을 기대한다.

기대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한미FTA가 매국적인 졸속협상이었음이 드러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이 그 사실을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이 따른다. 한미FTA의 문제점이 드러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측근들이 해결방책을 다 마련할 수 있다'는 초인적인 자아도취 능력이 발휘되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자아도취 능력은 대개 '자신이 뭘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아서 생기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한미FTA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사실과 경제 및 통상관료의 속성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 같다.

경제관료에 포위당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관료 또는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들에게 철저히 포위당해 왔음은 참여정부의 역사가 그대로 말해준다.

작년 초 신년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뜻을 밝혀 세상을 한번 뒤집어 놓았다. 당시 나는 좀 의아스러웠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취한 조세정책은 부유층을 위한 감세정책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한나라당이 하도 감세를 주장하니까 참여정부가 증세정책을 편 것으로 아는데 감세정책을 실행한 것은 사실 참여정부이다.

법인세2%포인트 인하, 소득세 1%포인트 인하, 과감한 특소세 축소가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감세정책이고 이로 인해 매년 4조원 정도의 재정이 감소되었다. 당시 시민단체 등에서 이러한 감세조치의 혜택이 일부 대기업과 상위 10%의 부유층에 집중되고, 재정 감소를 초래하여 복지혜택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감세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관료와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의 뚝심으로 관철시켜 나갔다.(일부에서는 종합부동산세를 예로 들어 감세정책 기조가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종합부동산세를 몇 번 뒤집을 만한 기타 감세정책 역시 매우 많다. 이를 일일이 설명할 수 없으므로 일단 그대로 넘어가자.)

2006년에는 저출산 문제가 가장 심각한 화두 중의 하나였다. 저출산 대책으로 보육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성계와 시민단체의 주장에 대하여 '취지는 공감하지만 재정부족으로 불가하다'는 것이 정부 측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외래진료비를 내지 않던 1종 수급권자인 빈곤층에게도 올 7월부터 병원을 찾을 때마다 1000∼2000원씩 본인 부담금을 물게 하는 의료급여제도 개선안을 발표하였다. 핑계는 '오남용 방지'이지만 속내는 '재정부담' 때문이다.

'감세→부유층 주머니 채워줌→재정 부족→복지 재정 축소→양극화 심화'는 너무도 쉽고 상식적인 논리이다. 그런데 경제관료는 이 논리를 '떡고물론'으로 비튼다. 즉 부유층이 돈을 쓰는 과정에서 서민층이 떡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으므로 양극화가 심화되지 않는다는 논리이다.

'떡고물론'으로 무장한 경제관료들

▲ 한덕수 국무총리는 재경경제부 장관에서 물러난뒤 한미FTA 체결지원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지난 3일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 총리가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 들어서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남소연

경제 및 통상관료는 '대기업과 부자들의 주머니가 넘쳐나야 서민들한테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고 이 떡고물이 바로 복지'라는 인식이 뼛속 깊이 박혀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서민과 중산층에 직접적으로 혜택을 주는 재정정책은 낭비에 불과하다. 이들에게 양극화 해소니 복지니 하는 단어는 면피용 선전구호 외에 다름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주변에 이런 경제 및 통산관료만 남아있는데 무슨 한미FTA 피해대책이 나올 수 있겠는가. 감세와 양극화의 연관관계는 한미FTA와 양극화의 연관관계에 비하면 매우 간단한 논리이다. 후자가 미·적분이라면 전자는 구구단 정도에 불과하다.

구구단 정도의 논리에도 속아 넘어간 대통령인데 복잡한 미적분 논리로 속이는 것은 관료들 입장에서는 누워서 떡먹기일 것이다. 아마 한미FTA 피해대책이라고 나오는 것이 거지에게 동냥 주는 듯한 대책이거나 양극화 촉진 대책이 아닐까 심히 걱정된다.

나는 작년에 대통령이 증세를 이야기할 때 그동안의 감세정책에 대한 후회와 반성에서 비롯된 것인줄 착각했다. 그래서 희망을 갖고 한 달간 <오마이뉴스>에 증세론을 옹호하는 글을 10편 넘게 기고한 적이 있다. 그동안 먹은 욕보다 더 많이 욕을 먹어가며 한달을 버틴 내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 없다.

한미FTA 타결 직후의 대통령 담화문을 보고 대통령이 한미FTA를 제대로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한미FTA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은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 스스로 한미FTA의 원래 목적은 '센 놈하고 붙어서 경쟁력을 키워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월마트를 이긴 이마트 정도가 되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할 텐데 어찌하여 양극화가 심화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마트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양극화가 심화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라면 이는 전형적인 '떡고물론'이다. 경제관료들에게 설득당하다가 이제 스스로 경제관료화된 모양이다.

노 대통령, 제대로 알고 있나

또 하나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중소기업 도산으로 양산된 취약계층은 복지서비스나 노동시장 정책 등으로 충분히 보호함으로써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투자자·국가 중재제도, 간접수용, 비위반 제소 등의 조항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투자자·국가 중재제도는 미국 투자자에게 우리 정부와 똑같은 법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우리 정부의 공공정책에 대하여 언제든지 제소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공공서비스 분야는 매우 매력적인 독점 시장이라서 외국투자자가 호시탐탐 노리는 분야인데,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혜택은 주로 이러한 공공서비스를 통하여 제공된다. 따라서 투자자·국가 중재제도는 복지정책에 매우 위험한 존재이다.

▲ 한미FTA의 주역들.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FTA 체결특별위원회 회의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답변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일부에서는 투자자·국가 중재의 대상이 되는 간접수용(직접수용이 국유화와 같이 투자자의 소유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부조치인 반면, 간접수용은 정부조치가 투자자의 재산권을 간접적으로 제약함으로써 기대이익을 포함하여 유무형의 손실을 초래하는 것을 말한다)의 범위를 크게 제한하였기 때문에 특정 기업에 대해 아주 심각한 차별적 조치가 아니면 제소를 할 수 없다며 이 제도의 폐해를 너무 침소봉대 한다고 반론을 펴고 있다. 과연 그러할까?

2000년 4월, 캐나다에 진출한 세계적인 택배회사 미국 UPS는 캐나다 정부가 국제우편물 통관절차에서 국영 우체국에 특혜를 주고 부동산 보유세를 감면하는 등의 차별적 조치로 손해를 보았다며 제소하였다. 청구금액은 1억6000만달러이다. 어느 나라나 국영우체국을 운영하고 있으며 서민들에게 값싼 통신서비스를 공급하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일정부분 혜택을 주고 있다. 이게 특정 기업에 대한 심각한 차별적 조치인가?

2001년 멕시코 정부는 과당이 들어있는 청량음료에 대하여 특별소비세를 부과하는 세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청량음료의 판매가 줄어들자 청량음료의 과당원료를 제공하는 미국기업 '콘 프로덕트'는 멕시코 정부를 상대로 제소한 바 있다. 새로운 세목 신설이 특정 기업에 대한 심각한 차별적 조치인가?

협정을 위반하지 않았음에도 어느 당사국이 상대 당사국에게 분쟁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비위반 제소 조항은 투자자·국가 중재 제도의 옥상옥 역할을 더할 것이다.

한편, 대통령은 교육·의료시장이 개방되지 않은데 대하여 유감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유감을 표할 필요가 없었다. '래칫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랫칫조항은 ▲한번 개방하면 역행이 안되는 역진방지시스템임과 동시에 ▲향후 우리나라가 특정분야에 대하여 자율적으로 개방하는 경우 미국에게 그 혜택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시스템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교육·의료 개방 안돼 아쉽다고? 걱정마시라

▲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본 대표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밝게 웃고 있는 '죽음의 동맹' 사진을 해머로 부수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참여정부는 교육·의료 등 공공성이 강한 서비스 분야에 대하여 향후 자율적 개방을 추진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미FTA 협정문에 이 분야에 대한 개방이 포함되지 않았더라도 래칫조항에 의해 앞으로 미국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개방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전혀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이 보기에 쇄국적(?) 성향을 가진 후임 대통령이 나중에 개방의 부작용을 깨닫고 다시 자율적으로 보호수준을 강화할 경우 다른 나라에 대하여는 적용이 가능하지만 래칫이 적용되는 미국에 대하여는 적용되지 않아 계속 높은 개방 수준이 적용된다.

결국 래치조항이 후임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미래 통상정책수단을 빼앗음으로 인해 노무현 대통령의 친미적 통상정책의 영향력이 계속 이어질 것이니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다.

투자자·국가 중재제도, 간접수용의 개념, 네거티브 리스트(Negative List) 방식, 래칫 조항, 미래의 최혜국 대우, 비위반 제소 등의 투자와 서비스 관련 조항은 우리나라의 입법·행정·사법권을 모두 포함하는 공공정책 수행권에 이중 삼중으로 심각한 제약을 주는 제도이다.

활발한 공공정책으로 한미FTA로 인해 추가적으로 발생할 취약계층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유지된 알량한 공공정책이나마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품에 대한 관세철폐로 인한 득실이 눈에 보이는 상처라면 이러한 투자 관련 조항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 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농업과 의약산업 외에 피해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처만 병이고 바이러스는 병이 아니라고 우기는 의사와 같다. 바이러스의 피해를 입증하는 방법은 죽는 길 밖에 없다.

태그:#한미FTA, #노무현, #협상, #자아도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