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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제목으로 복지관에서 글쓰기 수업을 한다. 어느 복지관이든 어르신 글쓰기에서 나오는 단골 소재는 어린 시절 이야기다. 처음부터 제약 조건이 있으면 글 나오는 길이 막힐까 봐 일단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막 쓰시라고 권한다. 그러면 대강 이렇게 나온다.
 
국민학교에 1년 늦게 입학했다. 끝나면 종일 밖에서 놀았는데 소를 끌고 나가 꼴을 먹였다. 놀다가 소나기가 와도 그냥 다 맞고 놀았다. 친구들과 팽이를 만들기도 하고 전화놀이도 했다. 한여름에 냇가에서 멱 감다가 다슬기를 잡았다. 요새 고등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핸드폰만 한다는데 우리는 고등학교 때도 산과 들로 나갔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에 하나씩'으로 한 문장(문단)에는 하나의 이야기만 쓰기를 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기에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계속 하나에 하나씩만 할 수는 없으니 이번주는 '좁게 가야 빛납니다'를 했다. 시간도, 공간도 좁을수록 글이 더 재밌어진다는 뜻이다.

윗글은 시간으로 보면 8-9세부터 고등학생까지, 공간으로 보면 산과 들과 냇가가 있다. 시간은 하루만, 공간도 딱 한 곳만 정해서 그 안에서만 써보시라고 권했다. 물론 처음부터 나오진 않는다. 수다 떨듯 하는 브레인스토밍이 필수다. 철수세미처럼 얽힌 머릿속을 말랑하게 풀어서 선 하나를 쭉 뽑아내야 '좁을수록 빛나는' 무언가가 나온다. 

때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쓰기 어렵다고 하시는 어르신도 있다. 기다리면 정리될까? 나는 '기다리면 기절해서 못 일어나요'라고 말한다. 열이면 열 모두 피식 웃으신다. 

"마냥 우리를 기다려주는 끈기있고 상냥한 소재는 없어요. 우리가 먼저 잡아채서 정돈해야 정리됩니다."

세상은 너무 빠르다. 어르신들에게는 더 그렇다. 그 속도에 비해 정리되지 않은 내 생각을 굳이 붙잡아 매고 풀어내는 수고는 시대에 역행하는 애잔함일 수도 있다. 하나라도 쓰기 시작하면 기억 못하고 지나가는 하루에 내가 여기 있다는 깃발을 꼽는 일이 된다는 말을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신다. 교실은 조용해지고 각자의 펜만 바빠진다.
 
못쓴다고 하시다가도 어느샌가 열심히 쓰는 어르신들
▲ 바빠진 펜 못쓴다고 하시다가도 어느샌가 열심히 쓰는 어르신들
ⓒ 최은영(미드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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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부터 고등학생까지, 산과 들과 냇가가 모두 있던 어르신 글이 좁아지면 이렇게 변한다.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며 엄청난 소낙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저마다 소를 몰고 산을 내려간다. 나도 꼴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산고랑을 내려오는데 소낙비는 더욱 세차게 내린다. 그때 갑자기 설사 신호가 온다. 하늘에서도 천둥이 치고 내 배도 천둥이 친다. 소낙비에 놀란 소가 이리저리 뛰고 있으니 더 죽겠다. 나보다 훨씬 큰 소가 놀라서 날뛰는 통에 시커먼 하늘이 노래진다. 순간 고삐를 놓쳤다. 설사는 삐질삐질 나오고, 꼴 지게는 넘어가고, 게타리(허리에 묶는 끈)는 풀리지 않는다. 

아까보다 훨씬 좁은 공간, 좁은 시간 속에서 훨씬 쫀쫀한 글이 나왔다. 이 분이 앞으로 어떤 글을 쓸지 궁금해진다. 어디로 펼쳐질지 모르는 가능성이라는 말이 어르신에게도 이토록 어울린다니, 그 가능성을 발견한 내가 대견하다. 그렇게 새로운 내가 차곡차곡 복지관에서 쌓인다. 어르신의 새로운 도전이 차곡차곡 백지에 쌓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SNS에도 올라갑니다.


태그:#내인생풀면책한권, #시니어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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