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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는 쓰러진 다음에 그 크기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김옥균의 암살은 조선은 물론 청국과 일본의 국제적 현안이 되었다.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은 "김옥균은 조선에서 반란을 꾀한 수범(首犯)으로 이제 조선인에 의해 상하이 조계지에서 피살되었다고 하니 그 죄에  응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만일 외국인들이 시비를 해오면 곧바로 이런 뜻을 알려주면 된다"고 공시했다. 

망명시기 냉대와 감시를 계속했던 일본은 사망 소식에 급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극우 명사 20명은 장례위원회를 구성, 위원을 상하이로 보내 시체를 인수케 하고 기념비 건립을 위한 의연금 모집을 결의했다. 

4월 15일부터는 15개 주요 신문사가 합동으로 김옥균 추모의연금 모집 캠페인을 벌였다. 체일 망명기간 홀대했던 일본 신문들이 사후에 이토록 연대하여 추모 의연금 모집에 나선 것도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문건의 내용이다.

한객(韓客) 김옥균 씨는 일찍이 비상한 뜻을 품고  비상한 때에 일어섰다. 종횡으로 방책을 이루지 못하고 쫓기어 타국의 외로운 나그네가 되었다. 유리곤돈 하기 거의 10년. 혹은 눈물을 남해의 뜨거운 파도에 쏟아 붓고 혹은 한을 북해의 차가운 달빛에 호소하였으나 지업(志業)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흉노의 독수에 숨을 거두었다. 

생각하건대 인생의 불행은 지업을 이루지 못하고 타국에서 객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특히 만리타향 의지할 곳 없는 망명객의 몸으로 정적의 독수에 숨을 거두게 되니 남아의 절장을 아홉 번이나 뒤짚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돌아보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10년의 오랜 세월을 하루같이 김옥균 씨에게 많은 호의를 표해왔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동포 제군이 최후의 호의를 표하여 의거의 소리를 울릴 때에 이르렀다. 너무 비통하고 한스러워 견딜 수 없다.

오호라!
그의 친 가족과 옛 친구들은 이미 정적의 독수에 숨을 거두었다.

천하가 넓다한들 우리나라 동포 제군을 제외하면 한 사람의 친교가 없는 것이 실로 김옥균 씨의 처지다. 동포 제군의 의기에 힘입지 않으면 씨의 영혼은 만 리나 떨어진 다른 곳에서 방황하는 영세불사의 귀신이 될 것이다. 이 어찌 의기협골을 가지고 이 땅에서 슬퍼하는 동포 제군이 참을 수 있는 것인가. 지금 우리 동지들은 느끼고 서로 의논하여 동포 제군의 의연금을 모아 부족하나마 김옥균 씨에 대한 마지막 호의를 표하고자 한다. 

오호라! 동포 제군이여! 표령낙백 지업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독수에 숨을 거둔 씨의  동정을 이해한다면 청컨대 응분의 의연금을 내어 정을 아뢰고 씨로 하여금 백년불명의 귀신이 되지 않도록 하시라. 

의연금의 액수와 용도 및 응모, 기타 절차는 다음과 같다. 
 - 의연금은 다음 용도로 충당한다
 김옥균의 유해 처리에 관한 일
 기념비를 건립하여 추도의 뜻을 표하는 일
 동지인 조선 망명객을 보조하는 일
 - 의연금은 10전 이상으로 한한다
 - 의연금은 마감 기한은 4월 30일까지
 - 의연금은 편리한 신문사 측에 보낸다
 - 의연금을 받은 신문사는 명단을 신문지상에 게재하여 영수증을 대신한다.(주석 14)


주석
14> 송본정순(松本正純), <김옥균전>, 14~17쪽, 도쿄 후생당, 1894, 여기서는 조재곤, 앞의 책, 101~102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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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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