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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취재뒷얘기 시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고 느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시민기자 여러분의 자발적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이한열 기념관의 전시실 전경. 너무나 소박하고 아담했다. 물품 중에는 장기보존을 위해 사진으로 대체된 것도 있다.
 이한열 기념관의 전시실 전경. 너무나 소박하고 아담했다. 물품 중에는 장기보존을 위해 사진으로 대체된 것도 있다.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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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사진집에 관한 기사를 하나 썼습니다.(관련기사: 이 한 장의 사진이 없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진집은 양장본에 코팅지가 사용돼 꽤 무겁습니다. 물리적인 무게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사진의 가치는 더욱 큽니다. 다행히 많은 분이 읽고 공감해 주셨습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요. 제가 느꼈던 그 뜨거움을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기사는 사진집 출판기념회에 중심이 맞춰 있지만, 사실 거기 방문하기 전 들른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서울 신촌에 있는 '이한열기념관'입니다. 그곳이 자꾸 눈에 밟히더군요.

너무 소박한 이한열 기념관... 괜찮을까요?

알고 계셨나요? 창피하지만 저도 몰랐습니다. 기사를 쓰면서 알게 됐지요. 민주화에 몸 바친 열사 중 처음 생긴, 그리고 아직도 유일한 기념관입니다. 신촌사거리 그랜드 마트 뒤편 골목길에 있는 4층의 작은 건물입니다.

"너무, 너무나 소박하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더군요.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선물해 주고 떠난 이가 이런 대우를 받다니요. 건물은 너무나 아담했고 전시실은 너무나 소박했습니다. 너무나요. 가벼운 마음으로 들렸던 곳에서 큰 울림을 느꼈습니다.

좀 더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3년 전 기사가 있더군요. 한 달에 5명이 찾는다고요. 기념관에 다시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상황은 생각보다 더욱 열악했습니다. 최초 설립 시에는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씨가 사비를 털었습니다. 국가에게 받은 배상금으로 신촌에 주택을 구입했고, 2004년 모금을 통해 지어졌습니다. 어머니는 기념관이 설립될 당시, 벽면에 이렇게 썼습니다.

장하다. 미운오리새끼.
이럴 수가 있느냐.
이한열.
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
엄마가.

어머니는 아들이 다 이루지 못한 뜻을 잇기 위해 오늘도 싸웁니다. 여전히 민주와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젊은이들도 하기 어려운 활동이지요.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농성장, 촛불집회, 철거민들의 시위, 용산참사 현장... 집보다는 투쟁의 현장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한열 기념사업회'란 사단법인으로 전환돼 있습니다. 법인이 됐지만 여전히 서울시나 국가에게 후원을 받지 못합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마포구는 '구민이 참가하거나 구민을 위한' 단체들 위주로 보조금을 지원합니다. 그래서 보조금을을 신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건물 임대료와 후원으로만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념관의 2층에는 <고발뉴스>가 입주해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박물관 등록을 추진중입니다. 박물관으로 등록이 되면 여러 보조금이 나온다고 합니다.

기념관의 문영미 큐레이터는 그래도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이 있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계절 별로 편차가 있으나, 연간 1200명 정도가 찾는다고 합니다. 그 중 절반 가까이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프로그램 '민주주의야 소풍가자'를 통해 찾는 어린이들입니다. 특히 6월에 가장 많고, 요즘은 조금 뜸한 편이랍니다.

이한열 기념관 입구에는 아이들이 와서 쓴 글들이 전시돼 있다.
 이한열 기념관 입구에는 아이들이 와서 쓴 글들이 전시돼 있다.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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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기념관을 찾은 어린이가 남긴 글. "당신이 있기에 저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에서 웃으세요."라고 적혀있다.
 이한열 기념관을 찾은 어린이가 남긴 글. "당신이 있기에 저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위에서 웃으세요."라고 적혀있다.
ⓒ 이한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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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09년부터는 후원금을 받아 '이한열 장학금'을 1년에 두 번, 열 명 정도에게 지급합니다. 장학생 선정 기준도 열사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한 자의 자녀, 사회적 약자, 깨어 있는 시민으로 활동한 자, 사회적 기업에 대한 구상이 있는 자'로 했습니다. 뜻깊은 장학금인 만큼, 혜택 받은 학생들도 사연이 저마다 남달랐습니다.

"저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제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노동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학진학률이 80%가 넘지만, 제 고등학교 친구들은 80%가 대학에 가지 않았습니다. 실업계 고등학생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 '이한열 장학생의 글'에서

잊히는 우리의 기억만큼이나, 전시된 유품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전시 물품들을 그대로 두면 손상이 심해질 것 같습니다. 최루탄 피격 당시 입었던 파란 티셔츠는 색이 바래가고, 신었던 운동화 밑바닥은 삭아서 절반 이상이 부서졌습니다. 

이곳에 오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래서 올해 6월에는 크라우드 펀딩이 시도됐습니다. 목표 금액을 뛰어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현재 열사의 유품은 장기보존 처리중이며, 이 작업이 끝나는 대로 1층 수장고와 4층 진열장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다만, 피격 당시 신었던 신발은 이미 손상이 심해  다른 보존 방법을 찾고 있답니다.

전시실에 있는 물품. 장기보존처리 중인 것들은 사진으로 대체돼 있는 상태다.
 전시실에 있는 물품. 장기보존처리 중인 것들은 사진으로 대체돼 있는 상태다.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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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의 유품. 유리상자가 놓인 책상도 광주집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옮겨뒀다.
 이한열 열사의 유품. 유리상자가 놓인 책상도 광주집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옮겨뒀다.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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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기념관의 문영미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몸 바친 열사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 가운데 개인 기념관으로는 이한열 열사가 유일합니다. 이곳이 잊히는 열사들을 모두 함께 기억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특히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현실에서, 그분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곳이 됐으면 합니다."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만 기억나세요? 기념관에 가면, 순수한 미소로 환하게 웃는 청년이 반겨줄 겁니다. 이렇게 순둥이처럼 보이는 해맑은 청년이 어쩌다 시위대의 선두에 섰을까요. 그를 그토록 분노하게 만든 건 뭘까요?

추운 겨울날, 무엇보다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관람은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능합니다. 미리 예약(02-325-7216)을 해야 합니다. 이한열 기념사업회(http://www.leememorial.or.kr)에 관련 자료와 기념관 약도 등이 있습니다.

혹시 기념관에 비치된 정태원 기자의 <서울발 사진종합>을 보시면 속지를 살짝 들춰보세요. 기분 좋은 스티커가 붙어있을 겁니다.



태그:#이한열기념관, #이한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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