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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민기자 취재뒷얘기 시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고 느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시민기자 여러분의 자발적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어온 세월도 어느덧 12년을 헤아리게 됐다. 누적 정식기사 1천 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잠시 숨을 고를 겸 기사와 관계되는 뒷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내게 '종북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

2005년 10월 민간 대북지원단체 '평화3000'의 일원으로 방북을 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평양과 묘향산만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 후에도 방북을 하고픈 소망이 있었고, 내가 적극적으로 원하면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을 테지만, 이명박 정권 하에서는 그 소망을 접어야 했다. 이명박이 하느님 사랑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며 살아야 할 크리스천-개신교 장로라는 사실과 연관하여 남북문제를 살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어디 남북문제뿐인가….

평양과 묘향산을 다녀온 후 <오마이뉴스>에 '북한 방문기'를 쓴 적이 있다. <불빛 없는 평양 시내 한가운데 서서>, <웅장하고 현란한 '아리랑' 공연>, <오늘의 방북은 내일의 통일로 가는 한 걸음>, <불빛 없는 평양에서, 변화의 희망을 보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묘향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등 다섯 꼭지의 글이었다.

2005년 10월 처음 평양에 갔을 때 순안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천주교 '작은 형제회' 석일웅 수사, 지금은 고인이 되신 권태하 선생과 함께.
▲ 평양순안공항에서 2005년 10월 처음 평양에 갔을 때 순안공항에서 찍은 사진이다. 천주교 '작은 형제회' 석일웅 수사, 지금은 고인이 되신 권태하 선생과 함께.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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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들이 <오마이뉴스> 지면에 발표되는 동안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다. 50대들이 주축을 이룬 상조회 모임 자리에서는 재미있는 언쟁도 있었다. 내 글들을 읽지는 않고 누구에게서 내 방북 사실을 전해들은 한 후배가 술 취한 소리로 "남한 사람들이 대규모로 평양을 가는 것은 김정일을 도와주는 짓일 뿐"이라는 말을 해서, 그 후배와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내게 전화를 걸어 "그렇게 북한 김정일에게 갖다 줄 돈이 있으면 우리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라"고 제법 점잖은 소리로 충고를 하는 이도 있었다. "괜한 전화로 시간 허비하지 마시고, 그 시간을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세요"라고, 나도 점잖은 소리로 충고를 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전화도 있었다. 태안군 이원면에서 산다는 한 농민은 내게 <평화3000>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고 싶고, 평양에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뜻을 표했다. 나는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에게 <평화3000>에 참여하는 방법을 잘 알려주었지만, 그는 아직 방북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나는 2004년 9월 <오마이뉴스> 지면에 <너희가 '친북'의 의미를 아느냐?>라는 제목의 글을 두 개 쓴 적이 있다.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해 '친북'이라는 말로 매도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접한 나머지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것은 친북 세력보다 오히려 수구 반공세력임"을 역설하는 내용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북한의 독재체제는 남한의 반공세력 덕을 보았고, 남한의 군사독재 정권은 북한의 세습독재 덕분에 반민주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해온 사실을 갈파하는 글이기도 했다.

그 글이 나간 후 심한 전화폭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가 직접 전화를 받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고, 내 노친이 전화를 받아 오히려 노친 쪽에서 큰소리로 야단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종북'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범람하지 않았다. '친북세력'이라는 말이 간간이 나돌았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갑자기 '종북'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종북몰이니, 종북사냥이니 하는 말까지 생겨나서 우리 사회를 가장 효율적으로 압제하는 말이 됐다.      

대체의학에 관한 정보 나누기

2009년 6월, 당시 86세였던 모친이 폐암말기 진단을 받고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때부터 나는 대체의학을 시행하면서 '간병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노친은 암세포가 골반으로 전이되었고, 골반의 암세포가 확장되면서 바로 그 부위가 골절되어 일어서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다.

다시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서 한 달을 지낸 다음 우리 고장의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모친은 입원 8개월만인 2010년 7월 5일 완쾌되신 몸으로 퇴원했다. 말기 폐암도 나았고, 골반의 암세포도 퇴치되었다. 엉덩이뼈의 골절은 단순 골절이 아니었다. 암세포가 확장되면서 바로 그 부위가 골절된 것이기 때문에, 그 뼈가 다시 붙는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노친이 말기 폐암에 이은 골반 암으로 입원 중이던 2009년 11월 서울성오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노친과 함께
▲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 노친이 말기 폐암에 이은 골반 암으로 입원 중이던 2009년 11월 서울성오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노친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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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노친은 병이 완쾌되어 지금도 건강하신 상태로 잘 생활하신다. 당신의 두 발로 걸어 다니시며 때로는 설거지도 하시고, 집안 청소도 하시고 세탁이며 다림질도 하신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노친이 서울성모병원 호스피스병동에 계시는 한 달 동안 수차례 서울을 왕래했고, 거의 매일 노친의 병상을 지켰다. 또 고장의 요양병원에 계시는 7개월 동안 매일 세 차례씩 요양병원을 다니며 간병을 했다. 내가 입수한 갖가지 대체의학 정보들을 활용하고 시행하면서 창의적으로 응용하기도 했다.

말이 쉬워서 식이요법이고 대체의학이지, 그것은 온 가족의 노고와 정성의 집합이었다. 나는 대체의학 활용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 간병의 실체들을 알뜰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오마이뉴스> 지면에 여러 번 발표했다.

간병일기와 간병의 성과들을 공개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정보'를 나누고자 하는 뜻이지만 뭔가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곧 많은 이들로부터 문의가 왔다. 절박한 상황에 처한 환자나 가족들이었다.

그들에게 대체의학 정보를 제공하며 상세하게 설명을 드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고도 하고 시간도 쓰는 일이며, 때로는 적게나마 비용 지출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간간이 내게 대체의학 정보를 구하려는 문의가 오는데, 대개는 <오마이뉴스>에서 내 글을 읽게 되었다고 하는 분들이다.

<오마이뉴스> 덕분에 나는 노친을 병마에서 구한 '간병일기'를 쓸 수 있었고, 또 그 덕분에 좋은 일도 계속하는 셈이다. 대체의학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작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사랑의 실천'이기도 하니,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영적으로 득이 되는 일일 터이다.

기사의 벌불, 또는 연쇄 현상

기사 형태의 글을 쓰다 보면 일종의 벌불 현상도 겪곤 한다. 하나의 기사 때문에 또 하나의 기사를 후속으로 쓰게 되는 경우를 '벌불'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경우가 여러 번이다. 처음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인데, 하나의 기사 때문에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기사를 연쇄적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7년째 여의도 국민은행 앞 농성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영곤 김동애 부부와 지난 5월 28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영곤 김동애 교수 부부 7년째 여의도 국민은행 앞 농성천막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영곤 김동애 부부와 지난 5월 28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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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오마이뉴스> 지면에 메인으로 오른 <교수 부부가 7년째 천막농성하는 이유는?>이라는 기사가 있다. <풍찬노숙 7년째, 대학교육 정상화를 위한 투쟁>이라는 기사 다음에 이어진 기사인데, 그 기사들 때문에 나는 또다시 벌불 현상을 맞게 됐다.

내가 그 기사를 쓰기 위해 여의도 농성천막에서 김영곤 김동애 교수 부부를 만난 때는 지난 5월 말이었다. 5월 말에 인터뷰를 하고 와서 8월 말에 겨우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이었다.

기사 작성이 늦어진 덕에 인터뷰 이후의 후속적인 사항들을 좀 더 기사에 담을 수 있었고,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오름'으로 나간 직후 민주당 우원식 의원실에서 마련한 대학교육정상화를 위한 토론회에서 내 기사 덕분에 대학강사노동조합 쪽이 유리한 분위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을 김영곤 교수에게서 들었다.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는 내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게 대학 강사로 생활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에 대한 얘기를 했다. 가슴 아픈 얘기들이었다. 그 얘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내게 노골적으로 기사를 부탁하지는 않았다. 내가 구순 노인을 모시고 살고 있는 데다가 내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쁘게 생활하는 사정을 잘 헤아리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대학 강사로 생활하다가 모멸적인 처우와 억울한 박탈감 때문에 끝내 삶의 의지를 접고 스스로 목숨을 끓은 대학 강사들에 관한 심층적인 기사를 써야 할 의무감과 사명감 같은 것을 저버릴 수 없을 듯싶다.

어차피 벌불 현상을 접했으니 조만간 후속 기사들을 써야 할 것 같다. 다시금 취재 길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사사로운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 어차피 기사 후일담 자체가 사사로운 범주에 속할 터이니, 여기에 잇대어 사사로운 얘기를 좀 더 벌불처럼 첨부하는 것도 조금은 괜찮을 듯싶다.

현장기사를 계속 쓰고 싶은 이유
  
2013년 1월 9일 저녁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열린 민간 대북지원단체 <평화3000>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때 축시 낭송을 했다.
▲ 축시낭송 2013년 1월 9일 저녁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열린 민간 대북지원단체 <평화3000>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때 축시 낭송을 했다.
ⓒ 평화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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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 얘기지만, 과거 파란만장한 15년 동안의 낙방 고투 끝에 '작가의 길'로 들어섰기에 문학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만큼 작가로서의 위기의식과 강박감 같은 것에 많이 시달리기도 했다. 또 전적으로 작품 생산에 투신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은둔과 칩거가 매우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동분서주하는 생활이기에 거의 절망적인 기분 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간다. 암 투병을 하신 올해 연세 구순이신 노친을 모시고 살면서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 환자인 내 건강에도 신경 써야 하는 일, 결혼을 늦게 하여 얻은 아직 공부 중인 아이들 뒷바라지, 우리 지역의 바다 '가로림만'을 지키기 위한 '가로림만생태문화협동조합' 이사장으로서의 책무, 내년 2014년이면 본당 설정 50주년이 되는 태안성당의 '50주년 준비위원장'으로서 갖가지 기념행사들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 또 본당 '50년사' 편찬위원장으로서 원고 집필에 매달리는 일, 게다가 지역종친회장 책무도 맡고 있어서 소설작품 생산에 몰두한다는 건 내게 너무도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한 번은 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몹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초연한 마음이다. 그까짓 소설을 못 쓰면 어떠랴, 불후의 명작을 쓴다 한들 그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에 불과한 걸…하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안한다. 소설가가 소설은 쓰지 않고 만날 딴 짓만 한다는 동료 작가들의 '비판'도 달게 감수한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대신 다른 글이라도 열심히 쓰자는 생각으로 요즘엔 시도 많이 짓고, 이런저런 토막글도 많이 쓴다.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하면서….

아무튼 그러므로 나는 글쟁이다. 죽는 날까지 글쟁이로서의 소임을 다할 생각이다. 내가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내 삶을 허락하시는 날까지 글쟁이의 소임을 다할 것이며, 죽는 날까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살아가면서 현장 기사들을 줄기차게 생산해 낼 것이다.

2013년 10월 16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천주교 평신도 2차 시국기도회'에 참가하고 묵주기도를 하며 대한문까지 행진을 할 때도 맨 앞(오른쪽 끝)에서 소형 마이크를 잡고 주송을 했다.
▲ 묵주기도 행진 2013년 10월 16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천주교 평신도 2차 시국기도회'에 참가하고 묵주기도를 하며 대한문까지 행진을 할 때도 맨 앞(오른쪽 끝)에서 소형 마이크를 잡고 주송을 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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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기사 뒷이야기, #방북기, #대체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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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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