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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아저씨!

이보와 바람을 쐬고 돌아와 내리 4시간을 잤다. 수직으로 꼿꼿하게 세워진 의자에서 불편하게 뒤척거리는 나흘라를 본 아저씨가 나를 부르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작은 버튼이 있었고 그걸 누르니, 꼿꼿했던 의자의 등판을 조금이나마 젖힐 수가 있었다. 정 많고 친절한 이집트 아저씨들 덕분에 우리는 배 안에서 남은 4시간 동안 편하게 잠을 청했다.

페리는 그렇게 열 시간을 꼬박 달려 이집트 누웨이바 항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익숙한 듯 짐을 챙겼고, 그 소리들로 배 안은 다시 수선스러워졌다. 우리도 잠에서 덜 깬 몸을 추슬러 다시 가방을 메야 할 시간이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이집트의 새벽 공기는 쌀쌀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구 너머로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익숙한 모습의 흙빛 산들이 보였고 해가 뜨면서 내뿜는 온기에 차가운 새벽 공기는 차츰 사그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내뿜는 날숨은 공기에서 얼어붙어 사람들의 코와 입마다 하얀 김이 뽀얗게 피어올랐다.

명색이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페리인데, 우리가 정박한 항구는 형편없었다. 황폐한 콘크리트 부두는 길게 이어져 있었고 짐을 싣는 차들만 바쁘게 오갔다. 사람을 위한 그 어떤 안내 표지판도,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화물만을 취급하는 항구처럼. 그래서 마치 내가 화물칸에서 내려온 짐짝이 된 듯한 착각도 들었다.

어스름한 새벽의 누웨이바 항구는 쌀쌀하고 한산했다.
 어스름한 새벽의 누웨이바 항구는 쌀쌀하고 한산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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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모드? 적당한 여유와 적당한 긴장!

그때 관광버스 같은 것이 오더니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머리에 얹고 몸에 단단히 묶은 사람들은 무질서한 모습으로 버스 입구에 몰려들었다.

3년 전 처음 이집트에 왔을 때 이집트는 내게 무질서 그 자체였다. 횡단보도도 없었고 신호등도 없었다. 4차선이든 8차선이든 그저 손을 들어 그 특유의 손짓과 함께 길을 건너면 그만이었다. 비자를 받으러 간 정부청사에서도, 패스트푸드점에도, 언제나 똑같았다.

하지만 그 무질서 속에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었다. 그들은 줄이 있어도 누군가 그 줄에 끼어들 여지 또한 언제나 남겨두었다. 노인과 아이를 안은 새댁과 어린 아이와 외국인 같은 이들은 그들만의 무질서 속에서도 양보를 받았다.

얼른 타라는 그들의 손짓에 급히 발걸음을 떼다 멈칫한다. 스스로 되뇌었다. '정신 차려 여기는 이집트야.'

우선 가격을 물어보았다. 남자는 나 같은 외국인의 질문을 여럿 받아보았다는 듯이 내 생각을 정확히 꿰뚫으며 호탕한 목소리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네가 산 페리 티켓에 이 버스비도 포함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타, 출발할 거라고 지금."

멋쩍은 웃음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그래, 여기는 이집트다. 믿을 것도 없고 못 믿을 것도 없는.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인 샤알라"

사진은 조금 흔들렸지만 그때의 차가운 공기까지 생생히 기억나게 한다.
 사진은 조금 흔들렸지만 그때의 차가운 공기까지 생생히 기억나게 한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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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하게도 버스는 3분쯤 달리더니 마치 치열한 경매가 끝나고 처참해진 청과물 시장처럼 보이는 장소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비와 뙤약볕만 피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듯한 청과물 시장의 지붕 위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Arrival(도착)'이라고 적혀있었다.

웃음이 났다. '그래, 여기가 이제 이집트란 말이지. 시작부터 너무 이집트스럽잖아!!!' 옆을 보니 이보가 웃고 있었다. 그도 아마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요르단에서 첫 개강 날 학교에서 만나게 된 우리는 순식간에 국적과 나이를 떠나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단짝이 되었다. 심지어 우리는 각자 찍은 사진조차 피사체와 구도까지 똑같았다. 말하자면, 생각이 같고 바라보는 곳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생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여행을 한 이보는 나와 가장 죽이 잘 맞는 친구였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지난 수십 년을 살아온 두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슷했던 우리가 또 다른 제3의 장소에서 만나 가까워질 수 있는 확률. 나는 이것을 인연이라 믿었고 서로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의 인생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도 좋아했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나도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를 여행을 함께 하기에 가장 좋은 친구였다.

그 옆에 나흘라는 잔뜩 긴장한 얼굴과 진흙 범벅의 바닥을 살피며 조심히 발을 딛고 있었다.

대만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국립대에서 아랍어를 전공하는 나흘라 또한 요르단에서 만난 똑똑한 친구였다. 똑 부러지는 성격에 드라마를 보며 배웠다는 유창한 영어, 해박한 지식과 유쾌함이 그녀의 매력이었다.

요르단에서 처음 이사하던 날 집에 나타난 검지손가락 크기의 바퀴벌레를 보고선 혼비백산 비명을 지르던 세 명의 한국인 아가씨들에게 구세주처럼 나타나 터프하게 슬리퍼를 벗어 도망가는 바퀴를 때려잡아준 세심함과 친절함도 갖춘 그녀는 내가 이사한 옆집에 사는 이웃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같은 아시아권에서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며 자란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거나 하면서 빠르게 친구가 되었다. 남자인 이보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민들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언제 두고 갔는지도 모르게 정성 어린 편지로 마음을 다독여주는 속 깊은 친구였다. 그렇게 정 많고 세심하게 남을 보살펴주는 그녀를 우리는 Granny(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언제나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들만 여행했던 이보와 '이런 식'의 배낭여행은 처음인 나흘라.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예약한 숙소에 묵는 여행을 주로 해왔던 나흘라에겐 사실 페리를 통한 이동부터가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처음 계획을 짤 때 그녀는 우리를 위해 편한 비행기를 포기했다. 그저 우리의 말을 믿어주고 함께 여행에 동참해준 그녀가 고마웠다.

사실 불편한 좌석과 탁한 공기,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던 10시간은 나흘라뿐 아니라 베테랑 여행자인 이보조차 지치게 했다. 내리고 보니 항구 또한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으니 나는 자연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나흘라가 이집트의 매력을 발견하기도 전에 질려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흘라가 우리와 이집트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구 할이 나의 이집트 예찬 때문이었기에 내 마음엔 상당한 책임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하는 일주일이 그리 녹록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이보와 눈이 마주친다. 그래, 우리는 또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나지막이 그가 웃으며 내게 속삭인다.

"We could survive somehow, we will see Sophie. In sha alla." (우리 잘 살아남을 거야. 지켜보자 소피, 인샤알라.(신의 뜻이라면)")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낯선 상황에 무기력하게 던져지고, 언제나 새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어떻게든 풀어낸다. 여행도 인생도 계획할 수는 있되 마냥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으며 우리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

선진화된 유럽의 어느 도시를 거닐어도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있고 우리가 아무리 몸을 사려도 터질 일은 결국 터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면 되는 것이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이집트를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울 것이다. 언제나 혼자서만 여행했던 이보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배울 것이며, 나흘라는 첫 배낭여행을 통해 나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에 대한 견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꽤 만족스러웠던' 3인조 여행의 추억을 얻을 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2012년 12월 29일부터 2013년 1월 19일까지 다녀왔습니다.



태그:#이집트 여행, #누웨이바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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