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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소 전경
▲ 남양마을 버스 정류소 정류소 전경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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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남양면에는 오래된 슈퍼마켓 '황해슈퍼'가 있다. 슈퍼 주인인 최 할머니는 정류소 직원 역할도 한다. 슈퍼 바로 옆에 군내 버스 정류장이 있는 탓에 버스표도 같이 파는 것.

1980년대 점방 식의 슈퍼는 추억 속 사진첩처럼 빛바랜 물건들이 들어차 있다. 장갑 뭉치, 성냥갑, 소주, 참기름병들이 먼지가 쌓인 채 한편에 놓여 있다.

먹어도 먹어도 고프던 고등학교 시절, 단돈 500원에 주린 배를 채워 주었던 빵도 보인다. 유통기한은 알 수 없다. 냉장고 속 음료수 캔 바닥에는 녹이 슬어있다. 좁디좁은 점포 안에 어찌어찌 사람 한 몸 누울만한 작은 방이 마련돼 있다. 거기서 할머니는 낮잠을 자기도 했다. 연탄으로 방을 덥히는 옛 방식이라 혹시라도 연탄가스 중독이 걱정돼 주의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근처에 집이 있는 할머니는 오전 9시에 출근해 해가 떨어질 무렵 퇴근 하신다. 명색이 슈퍼지만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은 없다. 부업으로 하던 표 판매가 주업이 되버린 상태. 1시간에 한 대 꼴인 군내 버스보다 더 띄엄띄엄 있는 승객이 영업 대상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겨울이나 여름이나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데 그냥 쉬셔도 되겠어요."
"그래도 언제 올지 모른디. 지키고 있어야제."

수다스럽지 않고 조용히 닫혀진 입술만큼 굳은 소신. 처음 뵈었을 때도 꾹 닫힌 입에서 조용하게 "버스표 살거유?"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이렇게 버스표 위탁 판매를 하면 한 장 팔 때마다 몇십 원이 자기 몫으로 온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부터 현금으로 버스비를 낼 수 있어도 표를 구입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옆구리에 부여잡았던 나무 판대기를 꺼낸다. 나무판에는 1100, 1700, 1900원짜리 버스표들이 종류별로 집게에 꽂혀 있다. 표를 하나 뜯어주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낡디낡은 소파 여러 대가 놓인 그곳은 주인의 지정석인 동시에 가끔씩 동네 사람들의 대합실로도 쓰인다. 대부분 할머니 혼자 차지지만 장날 같은 때는 맛깔나는 대화로 훈훈하다.

'툭'하고 쓰러진 황해슈퍼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어르신들
▲ 남양마을 버스정류소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 어르신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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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동네 학생들이 표를 사지 않고 버스를 탈 때도 있다. 그럴 때 어김없이 자리를 박찬 할머니는 버스를 향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불편한 걸음에도 부지런히 발을 놀려 학생들의 현금을 표로 바꿔준다. 거스름돈을 바꿔주는 복잡한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휴'하는 한숨과 함께 느긋하게 자리로 돌아온다.

찬 바람이 쌩한 추운 겨울에도 마스크를 쓰고 어김없이 자리를 지키던 할머니. 날씨가 풀려가던 2월 어느 날부터인가 익숙한 모습이 사라졌다. 마실 나가셨나. 몇 번의 의문에도 무심히 지나쳤다. 어느 날 저녁,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식당 아주머니의 입을 통해 할머니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2월 말 한적한 오후. 대략 4시 경이라고 했다. 천천히 가게로 향하던 할머니. 여느 때와 같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가게 근처에서 '툭'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지셨다. 큰일이라도 날까봐 발을 동동 구르던 주변 사람들. 병원으로 옮기려 급히 차에 태우던 택시기사 아저씨. 한적한 마을에 난리가 났다. "사람을 못 알아보더래요." 아주머니는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건지소도 몇 번 찾아왔던 분이었다. 큰 이상은 못 느꼈었는데…. 중풍이 온 것일까.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아, 그래 평소 머리가 자주 아프시다 그랬는데. 치료받으러 오면 다리만 침을 맞고 싶어해서 두통은 크게 신경 안 썼었는데. 뇌혈관 질환이 아니길 빌었다. 입원하셨다는 병원을 물었다. 느지막한 오후에 전화를 걸어 봤다.

주인 없는 버스정류소, 버스는 지나치고...

버스를 타는 사람들
▲ 남양마을 버스 정류소 버스를 타는 사람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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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남양 보건지소 한방과인데요."
"네, OO병원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저희 마을 최OO 할머니가 거기 입원하셨거든요. 건강이 어떠신가 해서요."

환자 개인정보 보호차원에서 바로 알려드릴 수가 없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다만 보호자나 간병인과 연결시켜 줄 테니 통화해보란다. 뚜루루 뚜루루. 딱딱한 전화 연결음에 약간의 긴장이 실렸다. 간병인이 전화를 받았다. 신원을 밝히고 할머니 상태를 물었다.

"혹시 중풍 같은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뇌진탕이에요."

뇌혈관 질환이 있어서 길 가다 쓰러지신 게 아니었다. 걱정과 달리 사람도 잘 알아본단다. 다만 소변이 잘 안 나오고, 말이 둔하다니 걱정이 됐다. 화장실을 가면 오줌이 잘 안 나오니까 병실로 가서 물을 들이켜고 다시 오는 상태란다. 큰 병이 아니라서 일반 병실로 옮겼고 그다음 주에 퇴원해도 큰 무리는 없다는 게 병원의 입장이었다. 가족 생각으론 아직 몸도 덜 회복된 분을 시골에 혼자 두기 부담된다.

할머니 가족들의 염려가 작용했는지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도 여전히 소파는 비어 있다. 1시간마다 버스는 주인 없는 정류소를 지나가고, 승객들은 현금으로 버스비를 갈음한다. 어느덧 3월. 마지막 추위를 눅이려는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무심한 빗줄기가 애꿎은 슈퍼 창문을 두드린다. 주인 없는 가게는 말이 없다.


태그:#공중보건의, #한의사, #고흥군 남양면, #버스 정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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