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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서 환자를 기다리면서 속으로 간단한 내기를 한다. '이번에 오는 분이 혼자일까 그룹일까?' 대부분 혼자 오시는 분들이 많지만, 여러 명이 올 때는 생각보다 다양한 조합이 존재한다. 확률적으로 같은 마을 친구들인 경우가 가장 많고, 부모 자식이 오는 경우도 은근히 있다. 아주 드물게 부부가 같이 올 때가 있는데, 아내는 치료를 받아도 남편은 옆에서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남편분들은 혼자 와서는 치료를 받아도, 부부 동반일 때는 묵묵히 옆자리를 지키는 경향이 있다. 남자로서 자존심과 아내에 대한 애정이 함께 발동하는 것일까?

 

 

최근 이틀 연속으로 부부 동반 내원이 이루어졌다. 첫째 날에는, 파킨슨씨 병에 걸린 김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모시고 왔다. 몸이 덜덜 떨리는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꼬옥 안아서 침상으로 올려주었다. 침상에 올라와서도 손을 계속 떠는 할머니. 어디가 아프신지 여쭤보니 띄엄띄엄 아픈 데를 말한다. 말이 분명치 않을 때는 할아버지가 대신 말해준다. 부부가 함께 말을 완성했다. 두통도 있고 숨도 가쁘다고 해서 우선 폐의 기운을 보하는 침 처방을 내렸다. 할머니는 누워서 침을 맞는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침 두유가 있길래 드시라며 하나 드렸다. 할아버지는 두유를 쭉쭉 빨아 마시면서 할머니를 또 다시 지그시 쳐다보았다.

 

15분 동안 유침(침을 꽂아놓는 것)을 하고 진료가 끝났다. 걸음이 불편한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다시 부축했다. 이인삼각달리기 선수처럼, 처음에는 기우뚱 하더니 서서히 호흡이 잘 맞는다. 보건지소 정문으로 같이 따라나갔다. 할아버지의 왼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고, 오른손은 할머니의 허리춤에 닿아 있었다. 김 할머니는 허리를 두른 할아버지의 팔에 편안함을 느끼는듯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20대의 젊은 남녀가 함께 걷는 모습에서 설렘과 두근거림을 느끼듯이, 그 한낮의 정경은 나에게 묘한 울림을 가져다 주었다.

 

둘째 날, 또 다른 부부가 오셨다. 4년 전에 중풍으로 오른쪽 반신마비에 걸린 신 할머니. 그 분이 탄 휠체어를 밀고 오신 할아버지. 침상에 올리는데, 할아버지 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나와 간호사 선생님까지 셋이 달려들어 할머니를 침상에 누인다. 오늘 따라 유독 몸이 아파서 영감한테 부탁을 했단다. "영감이 힘이 없응께 부탁하기도 미안함시도 너무 아파서 오늘은 부탁했당께."

 

 

보통 아프면 이기적이 된다던데, 이 분은 아픔과 동시에 미안함을 크게 느끼시나보다. 자기가 아파서 고생하는 건 괜찮은데, 영감이 고생이라며 얼른 죽으면 좋겠다는 말을 망설임없이 하신다.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대꾸한다. "이런 병은 금방 죽지도 않어. 할매." 때마침 옆에 있던 여러 어머님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저렇게 누웠어도 오래 살고 영감처럼 생생해도 빨리 갈 수 있어. 죽으면 좋지만 죽어져야 말이지."

 

두 분을 보면서 '태어난 때는 달라도 죽을 때는 같이 죽자'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할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봐주는 할아버지의 눈길만으로도 할머니는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뜸을 뜨다가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다시 외친다. 간호사 선생님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그런 소리 말어요. 영감님은 어쩌라고."

"나 죽으면 영감이 자식들이랑 편하게 살겄제."

 

"어떻게 자식들이랑 산대? 자식이 얼마나 생각해 줄 줄 알고. 나도 자식이지만 나이 들면서 부모 챙기기가 어려워지대."

 

고단한 현실에 치이다보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은 되어도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죽음도 삶의 또다른 연장이라고 본다면, 부부가 한날 한시에 같이 저 세상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건 제2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짝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일테니까.


태그:#부부, #동행, #보건지소, #공중보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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