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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없다보니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을 종종 겪는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강사 대신 담양에 있는 전남교육연수원으로 '땜빵' 강의를 하러 가던 날이었다. 순천에서 담양까지는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일반 버스를 이용하면 두 시간이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방학 동안에는 관광버스를 이용하는 연수생들도 많지만 이미 자리가 다 차버린 뒤였다. 다행히도 연수를 취소한 수강생이 생겨 일이 순조롭게 되었다. 그렇다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관광버스가 정차하는 곳까지는 차로 오 분이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차가 없으니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내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하는데 어느 편이든 넉넉히 시간을 계산해서 나가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서둘다 보면 영하의 추운 거리에서 벌벌 떨고 서 있기 십상이다. 나는 아내의 눈치도 그런 것 같고, 또한 그동안의 관습상 시내버스를 타기로 하고 시간을 재보았다.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까지 합해보니 한 시간 전에는 집에서 나가야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오전 6시 40분. 그보다 한 시간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양치질하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현관에서 막 구두를 신고 있는데 아내가 묻는다.  

"택시 타고 갈 거야?" 
"응? 왜?"
"날씨도 추운데 시내버스 기다리려면 너무 추울 것 같아서."
"그럴까? 그럼 나야 좋지."
"택시 값이 얼마나 나올까?"
"글쎄. 4~5천 원쯤 나오겠지 뭐."
"그럼 택시 타고 가. 돈 벌어서 뭐해? 이럴 때 쓰라고 돈 버는 거지."
"그건 맞아. 그럼 천천히 나가도 되겠다."

나는 시간을 벌게 되어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지난 1월 8일 창립식을 가진 '교육공동체 벗'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창간 준비호였다. 사실은 전날 밤에 두 꼭지만을 남기고 다 읽었던 터라 버스 속에서 마저 읽고 수강생들에게 소개해주려던 참이었다. 남은 꼭지 중 하나가 이혁규 교수(청주교육대학 사회교육과)가 쓴 '교사, 가르치는 존재에 대한 성찰'이었다. 십분 쯤 읽어가다 보니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자가 스승을 택하는 것은 스승에 대한 신뢰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근대 공교육은 이런 신뢰관계에 기반해 있지 않다. 오늘날의 교사들을 교과서를 가르치는 기능적인 전문가들이다. 교사가 교과서를 가르치는 이 익숙한 상황은 그러나 매우 중요한 관계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에서도 서책이 매개된다. 중요한 서책은 종종 경전처럼 중시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스승은 경전보다 우선한다. 수도계의 비법을 알려주는 많은 비서(秘書)들이 문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백지 서책으로 종종 은유되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과거의 교육은 교과서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승을 통해 배우는 것이 더 가깝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교육에서 교과서는 교사보다 앞서 존재한다. 양자의 관계는 역전되었다. 교사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존재이다. 학습자는 교사를 통해 교과서의 지식을 전수 받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지식만 잘 가르치면 되지 교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부차적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사는 다른 전문직과 별로 구별되지 않는다. 예컨대 전문직으로서 의사는 환자를 잘 고치기만 하면 된다. 의료행위가 끝나고 나서 그가 어떤 인격적 특성을 보이는지를 문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교사를 다른 전문직과 같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역할 수행자로 자리 매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교육의 위기가 배태된다. 가르치는 행위를 가르치는 존재의 인격성과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158쪽)

여기까지 읽고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날 참이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보니 아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눈으로 물어보니 아내의 말이 이랬다.

"당신 참 많이 변했어. 근데 요즘은 좀 짠한 생각이 들더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오늘 같이 추운날 누가 택시 타지 시내버스 탈 생각을 하겠어. 당신은 내가 그러길 바라니까 그런 거잖아."
"난 또 뭐라고."
"당신이라고 차를 사고 싶지 않겠어?"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야."
"당신 사회활동 하는 거 이해해주는 그런 여자 만났으면 당신이 더 활개치고 그랬을 텐데…."
"난 지금이 좋은데 뭐. 그리고 내가 사회활동 안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아내는 정말 내가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좋다는 내 말도 그저 아내를 달래기 위한 헛말은 아니었다. 택시에서 내려 버스를 기다리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택시 타니까 빠르긴 빠르다. 근데 말이야…"
"앞으로는 택시 타고 가. 당신 보내놓고 정말 미안하더라."
"미안하긴. 나 그 말 들으려고 전화 한 거 아니고. 생각해보니까 당신이 고맙더라고. 물론 당신 같은 사람 안 만났으면 내 생활이 좀 더 자유로웠겠지. 하지만 난 요즘 정말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늘 당신하고 얼굴 맞대고 사는 것이 너무 좋아. 길이 들어졌다면 들어진 건데 뭐 어때? 나도 나름대로 사회생활하고 있잖아. 더 욕심낸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닐 거고. 우선 내 안에 평화가 있어야 남들도 평화롭게 해줄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래도… 미안하고 짠하더라."
"그럼 용돈을 좀 올려주던가?"
"……."
"차 오겠다. 전화 끊을 게."

마음은 짠해도 용돈은 올려줄 수 없는 모양인지 짧은 침묵으로 응수하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리자 쿡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차가 왔고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교사가 국어, 수학, 사회, 음악 등에 대한 지식을 훌륭하게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방탕하고 비겁하고 거짓말쟁이라면 교사로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은 단지 아이의 머릿속에 수많은 학문적․기술적 지식을 채워 넣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결정적으로 품성과 태도를 형성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교육은 분업의 진전을 통해 가르치는 활동에서 교사의 인격성까지 분리시키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교사의 몸과 품성으로부터 배우는 교육의 전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근대 교육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158쪽)    

글쓴이는 '가르침의 표준화와 교수 로봇의 등장'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 다음과 같은 끔찍한 예언을 하기도 한다.

'가르침의 표준화가 도달할 최종적인 종착점은 아마도 기계화된 로봇이 될 것이다. 수업의 발생에서 시작된 최초의 분업은 계속적으로 더 진전된 분업의 체계를 확산시키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에서 인격성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되어 왔다. 이런 역사적 진전의 종착점 근처 풍경은 휴먼로이드 로봇이 인간을 가르치는 풍속화일 것이다. 스승에서 교사로, 교사에서 로봇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근대 교육의 불안한 묵시록을 접하게 된다.

로봇이 인간을 가르치는 교수학습의 형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진화해 갈 것이다. 아마도 그 최종적인 형태는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학습 형태가 아닐까 한다. 인체에 연결된 점을 통해서 지식을 습득하는 미래의 교실에서는 자발적인 노력의 의지를 작동시켜 무엇을 배우는 유사 이래의 오랜 인간 활동은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에 도달하면 우리는 '학습하는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159쪽)'

지난 1월 8일 창립식을 가진 '교육공동체 벗'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창간호를 올 3월에 출간할 예정이다. 지난 창립식에서는 <오늘의 교육>창간준비호를 선보였다.
▲ <오늘의 교육> 창간준비호 표지 지난 1월 8일 창립식을 가진 '교육공동체 벗'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창간호를 올 3월에 출간할 예정이다. 지난 창립식에서는 <오늘의 교육>창간준비호를 선보였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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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쩌란 말인가?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내 안에서 이런 물음이 생성되어가고 있을 무렵 우리 교육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진단한 글쓴이의 대안에 해당하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스승 없는 시대인 오늘날, 우리는 교육의 위기를 말한다. 그 위기를 극복할 해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계속해서 탈인격화해 가는 사회적 진화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닐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교학상장을 통해 함께 성장하는 전통을 회복하는 것! 이로서 더 나은 표준을 향해 구도하는 거대한 학습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소속되는 것! 이런 오랜 동양적 교육의 전통을 다시 찾는데 위기 극복의 열쇠가 있지 않을까?(159쪽)'

'물론 시대는 변하였고, 우리가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글쓴이도 인정하고 있다. 하여, 그는 '이런 시대에 우리 인간 교사가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인 활동은 배우는 삶이 가치 있고 추구할 만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삶을 살도록 학생들의 의지를 각성시키는 것이 아닐까?' 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교사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자신은 배우기를 즐기지 않으면서 계몽의 경계선인 교탁과 책상을 사이에 두고 학생에게 배움을 강요하는 그런 관계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능력을 신뢰하고 배움의 의지를 작동시키는 탈근대의 꿈을 향해 교사들은 가르치기를 잠시 멈추고, 스스로가 학습하기를 즐기는 존재인지를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왜 우리 자녀들을 로봇이 아닌 인간이 가르쳐야하는지에 대한 문명사적 의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셈이다. 당신은 어떤 교사인가?(160쪽)'

여기까지 읽고 난 뒤 마지막 남은 한 꼭지를 마저 읽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돈을 남만큼 벌어다주어도 차도 못 사게 하고, 택시도 못 타게 하고, 가까운 거리는 아예 버스도 타지 못하게 하고 걸어가게 만드는 아내의 극성 덕에 나는 진화의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며 살아온 셈이다. 중요하고 재밌는 것은 그런 역진화의 과정 속에서 내가 얻은 것은 마음의 평화요, 기쁨이요, 행복이란 사실이다. 

당신은 어떤 교사인가? 나는 아이들을 기쁨으로 가르치는 교사라고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교육의 문제가 상당 부분 학교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스스로 학습하기를 즐기고 있으며, 내 자녀와 학교 아이들을 로봇이 아닌 인간이 가르쳐야하는지에 대한 문명사적 의문에 답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모두 아내 덕인 것 같다. 싹수를 보아하니 허랑방탕한 삶을 살고도 남았을 내게 소박한 삶의 가치와 즐거움을 일깨워준. 됨됨이를 보아하니 사회 진화의 속도보다도 더 빨리 더 멀리 가려고 안달이 나고도 남았을 어리석은 남편에게 애써 참된 인간의 속도로 걸음마를 시켜준.

아내야, 고맙다!


태그:#오늘의 교육, #교육공동체 벗, #이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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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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