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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8일(월)


간밤에 오늘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리고 산간지방에는 눈이 온다고도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거제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그 대신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것도 맞바람이다. 일단 비가 오는 데다 바람까지 부는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하지만 비가 오는 대신에 바람이 부는 게, 비가 내리는 것보다 더 낫지는 않다. 몸이 무거운 상태에서는 차라리 바람이 부는 것보다는 비가 내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기예보에 내일까지 찬바람이 분다고 했으니 미리 각오를 하는 게 좋겠다.

벌써 며칠째 기사를 쓰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포기를 했다고 봐야 한다. 매일 저녁 여행을 마치고 나면, 피곤이 엄습한다. 몸을 씻는 것조차 귀찮은 마당에, 방바닥에 주저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건 이제 생각조차 하기 싫다. 컴퓨터에 전원을 꽂아 몇 번 글쓰기를 시도해 봤지만, 더 이상의 진도는 나가지 못했다. 그저 전원을 켜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풍차가 보이는 바람의 언덕. 왼쪽 언덕 아래는 도장포.
 풍차가 보이는 바람의 언덕. 왼쪽 언덕 아래는 도장포.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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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완주'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은 가능한 한 그날 저녁에 정리해서 올리겠다는 약속은 더 이상 지키지 못하게 됐다. 사진을 카메라에서 컴퓨터로 옮겨 담는 단순한 일조차 미룰 때가 있으니 두말 해 무엇하랴.

이번 여행에서 주요한 목적 중에 하나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그날의 바닷가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거였다. 독자들이 내 글과 사진을 보는 그 순간만큼은 실제 바닷가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그걸 해내지 못하게 돼서 대단히 미안하고 섭섭하다.

이제 남은 건 애초 목적했던 대로, 이 여행을 끝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물론, 완주가 쉬운 일은 아니다. 앞으로 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은 당장 거제도가 최대의 걸림돌이다. 거제도가 나를 몹시 힘들게 만들고 있다.

어제는 남쪽 해안을 돌면서 거의 녹다운 상태로 여행을 마쳤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거제도의 동쪽과 북쪽 해안을 돌아야 하는데, 이 지역은 내가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는 곳이다. 완주는 과연 내가 처음 목적했던 대로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지금은 사실 모든 게 다 불투명하다.

어제 무리를 한 탓인지 오늘 아침엔 다리가 몹시 아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그땐 정말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다. 펜션을 나서자 바로 오르막이다. 무릎 관절에 채 '윤활유'가 돌기도 전이다. 2차선 도로가 산 속을 헤집고 올라간다. 여차재라는 이름의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다. 고개 위로 찬바람이 휘몰아친다.

기가 막힌 건지 숨이 막힌 건지, 이제는 더 이상 내 입에서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 와중에 숲 속 어디에선가 계속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때가 때인 만큼 그놈들이 나무 꼭대기에 앉아 나를 주의 깊게 내려다보고 있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거제도는 제주도만큼이나 까마귀가 많은 곳이다. 가는 곳마다 머리 위에서 깍깍 울어대는 까마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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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거제도 전체가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으로 내려가는 길, 동백나무 숲.
 바람의 언덕으로 내려가는 길, 동백나무 숲.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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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세다. 산 속 도로를 내려와 다대항을 지날 무렵, 바다에서 불어온 회오리바람이 도로를 휩쓸고 지나간다. 몸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자전거 위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길가 담벼락에 기대서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다대항을 떠나 다시 '바람의 언덕'까지 천천히 언덕을 오른다. '바람의 언덕'은 거제해금강을 가는 좁은 길목에서 왼쪽으로 바다를 향해 돌진하는 듯이 툭 튀어나온 바위 언덕을 말한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바람'과 '언덕'이라는 단어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있다. 적나라하다. '바람'과 '언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바람의 언덕은 사실 누렇게 변색한 풀밭 외에 달리 봐줄 것이 없는 황폐한 언덕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이 먼 곳까지 찾아오는 이유는 아마도 '바람'이 되고 싶었던, 그래서 그 바람처럼 푸른 하늘을 날고 싶었던 소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람'이 바닷가 바위 '언덕' 위로 거세게 불어닥친다. 언덕 위에 서 있으면 내 몸이 광대한 바다 위에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닷가 높은 바위 언덕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왜 이곳을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르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바람의 언덕은 동경의 대상이다. 꼭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오늘 내게 바람의 언덕은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바람'과 '언덕'이 함께 따라다니게 되면,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은 되는 악조건이 형성된다. 바람의 언덕에서 마주친 '바람'과 '언덕'이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예고하고 있다.

바람이 부는 날, 바람의 언덕을 넘어가는 바람 소리가 마치 내게 '오늘 네가 가야 할 길이 이곳에 있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오늘 내게는 바람과 언덕은 물론이고, 바람의 언덕 또한 '역경'과 '고난'을 이야기하는 단어들일 뿐이다. 바람의 언덕을 떠나면서, 나는 사실은 거제도라는 섬 전체가 바람의 언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구조라해수욕장
 구조라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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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사체를 쪼아대고 있는 까마귀떼

학동몽돌해수욕장
 학동몽돌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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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는 바람만큼이나 몽돌이 많은 곳이다. 바닷가 대부분의 해수욕장들이 몽돌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지나온 여차몽돌해수욕장이 그렇고,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해수욕장인 학동몽돌해수욕장 역시 몽돌밭이다. 몽돌밭이 사진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넓다.

바람과 몽돌 역시, 바람과 언덕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제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몽돌이 왠지 믿음직스럽다. 그래서 그런지 몽돌밭 위에서는 바람마저도 잔잔한 느낌이다. 해안에 몽돌밭이 어찌나 많은지 거제도를 대표하는 상징물 역시 몽돌이다.

학동몽돌해수욕장을 떠난 뒤로도 계속 언덕이다. 바람 또한 그칠 줄 모르고 불어오고 있다. 바람이 매우 차다. 온몸의 감각이 점차 둔해지고 있다. 이제는 별 생각 없이, 거의 기계적으로 페달을 밟고 있다. 그러다 구조라해수욕장으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서 '끔찍할 수도 있었을' 광경을 목격한다.

까마귀들이 도로 위에 피를 흘린 채 널브러져 있는 고양이 사체를 부리로 쪼아대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을 장면이다. 그런데도 오늘은 별 다른 느낌을 받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자연만큼이나 '잔인'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장승포를 지나면서, 거제도에 들어서 처음으로 자전거도로가 나타난다. 반가운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조금 허탈하다. 이 자전거도로는 그냥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인도도 아니고 갓길도 아닌 길을 차도와 분리해서는 그 위에 살짝 자전거도로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장승포를 지나면 바로 옥포조선소다. 옥포조선소 근처에는 조선소로 출퇴근하는 차들과 오토바이들이 발에 거치적거릴 만큼 많다. 그러니까 이곳의 자전거도로들은 그 차들과 오토바이를 피해 자전거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것마저도 조선소를 벗어나면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의 도로들은 그만큼 거칠고 험하다.

장승포항에서 시작되는 자전거도로
 장승포항에서 시작되는 자전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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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조선소 앞 도로. 갓길을 점령한 자동차들
 옥포조선소 앞 도로. 갓길을 점령한 자동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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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가라'는 말에 눈물이 나올 뻔하다

흥남해수욕장을 지나는 사이, 어느새 해가 크게 기울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은 장목면의 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그러려면 앞으로 20~30km 가량을 더 가야 하는데, 내가 과연 해가 지기 전에 그곳에 당도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남은 힘을 다해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이미 체력이 바닥이 나 있는 상태다. 언덕을 거의 걷는 것과 같은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가거대교 공사장 부근의 한 언덕에서 여러 명의 행인과 마주친다. 노무자들로 보이는 남자들 여러 명이 언덕 위에서 내려오더니, 도로 건너편에서 내게 말을 붙인다. 이럴 땐 말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그 양반들이 그걸 알 까닭이 없다. '어디까지 가냐?' '어디에서 왔냐?' '혼자냐?'고 따발총처럼 쏘아대는데 숨이 컥컥 막힌다. '강원도 고성' '서울'… 하고 최대한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랬더니 그들 중에 서울에서 온 사람이 또 묻는다, '서울 어디냐?'고. '길음동'이라고 했더니, 자기는 '보문동에 산다'며 같은 성북구라고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이때쯤 나는 그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 남자는 수개월 집을 떠나 이 낯선 곳 험한 공사장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얼마나 집이 그리웠으면, 같은 '구'에 산다는 말만 듣고도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을까? 내가 무뚝뚝한 반응을 보여서 꽤 뻘쭘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머리 위로 두 팔을 흔들며 소리친다. '조심히 가라'고. 순간 그 말에 어찌나 가슴이 뭉클해지던지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제길 그게 다 이놈의 언덕 때문이다.

장목면 면소재지에는 근처도 가지 못했는데 해가 지고 있다. 거제도 최북단에 있는 구영해수욕장 근처, 이름도 알 수 없는 작은 포구 앞이다. 계속해서 가다가는 도중에 해가 떨어질 게 분명하다. 할 수 없이 포구 앞에서 민박을 찾는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민박조차 모두 만원이다. 가거대교를 잇는 도로 건설 공사 때문에 주변의 숙박업소들을 모두 공사장 노무자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제도와 부산을 잇는 도로. 오는 12월 중순 개통 예정.
 거제도와 부산을 잇는 도로. 오는 12월 중순 개통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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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거가대교. 자전거여행자에겐 그림의 떡.
 부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거가대교. 자전거여행자에겐 그림의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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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벽'처럼 보인다

낭패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해가 기울면서 기온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잘 곳이 없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한탄해 봐야 소용이 없다.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달려간다. 가능한 한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정신없이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면소재지에 도착해서도 숙소를 찾지 못한다. 이미 거리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뒤다. 막막하다.

한참을 헤맨 뒤에 거리의 한 상점에서 이곳엔 여관은 물론이고 민박도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 그리고 어딘가에 여인숙이 한 곳 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곳은 차마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여인숙과 관련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날 밤, 다시 밤길을 더듬어 실전리라는 마을까지 달려간다. 그 마을에 모텔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실전리는 칠천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차라리 잘 됐다 싶다. 내일 아침 일찍이 칠천도를 들어갔다 나오면,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거제도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전리까지 밤길을 달리는데 어디선가 또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그 순간 머리 속으로 구조라해수욕장 근처에서 고양이 사체를 쪼아대고 있던 까마귀떼가 떠오른다. 섬뜩하다. 환청일지도 모르지만, 이놈들이 하루 종일 내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두운 밤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에 우려를 나타낸 분들이 계시다. 시골길은 특히 더욱 더 위험하다면서 자전거를 타지 말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나도 밤이 무섭다. 특히 까마귀 울고, 자동차 우글대는 밤길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나 멈춰 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밤길 여행을 감행하는데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오늘은 종일 뭔가에 쫓기듯이 다급했던 하루다. 그리고 언덕이 얼마나 힘에 부치던지, 오늘 드디어 길이 길로 보이지 않고, 내 앞에 벌떡 일어서 있는 벽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여행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점점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85km, 총누적거리는 3688km다.

덧붙이는 글 | * 11월 6일 이후로 여행 중에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11월 6일 이 후 11월 30일까지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기사는 11월 6일 이전에 작성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12월 1일 이후에 게재하고 있는 기사는 11월 23일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서울에서 작성한 것이다.



태그:#바람의 언덕, #학동몽돌해수욕장, #구조라해수욕장, #거가대교, #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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