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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산 자락에 있는 옥수동. 앞이 한강인 배산임수 지역이다.
 매봉산 자락에 있는 옥수동. 앞이 한강인 배산임수 지역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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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중퇴 학력 제비, 농고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상경한 순진한 총각,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을 꿈꾸는 노처녀 경리사원, 이혼녀 카페주인….

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에 나온 사람들이다. 제비 홍식(한석규)은 여자친구와 공모해 사기를 치고, 영숙(채시라)은 자존심 강한 척 하지만 결국 별볼 일 없는 제비에게 마음을 뺏긴다. 순진한 처녀 호순(김원희)은 영숙만 바라보는 춘섭(최민식)을 마냥 기다린다.

잘난 것 없고 뭔가 빈 듯한 이 사람들에 시청자들은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때론 뻔뻔스럽고 때론 거짓말도 하고, 때론 사기를 친 뒤 죄책감에 빠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은 바로 우리들 모습이었다.

<서울의 달> 무대가 된 곳은 서울 매봉산. 매봉산은 봉화산, 국사봉, 옥녀봉, 남산 등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흔한 산 이름 중 하나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1년 동안 산림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이 모두 4400개라고 하니, 우리나라엔 숱한 매봉산이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매봉산은 성동구 옥수동에 있다.

달동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촬영지가 됐을 만큼 옥수동은 서울에서 유명한 달동네였다.

김태수가 쓰고 김영수가 연출한 연극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는 옥수동과 압구정동의 처지를 제목에 고스란히 담았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두 동네는 빈과 부의 양 극점을 상징했다.

매봉산 꼭대기에 있는 동네. 동호공고에서 내려다봤다.
 매봉산 꼭대기에 있는 동네. 동호공고에서 내려다봤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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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의 이런 분위기는 1980년대 말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걸음이 주 교통수단이던 시절 가파른 산 지형은 불편한 곳이었지만, 자동차가 대량 보급되면서 불편은 매력이 됐다. 배산임수 지형인 옥수동은 높은 조망권과 함께 매력 있는 재개발 대상지로 떠올랐다.

1980년대 말부터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아파트가 대거 등장했고 곧 인기를 끌었다. 1990년 6월 1, 2일 실시된 옥수동 재개발지구 현대아파트 분양은 재분양 사상 최고 신청률을 기록하면서 국세청 투기조사 지역에 포함됐다.

1993년 3월 옥수동 258번지일대 1만2021여평이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됐고, 1995년에는 1만4868평으로 늘어났다. 1997년 상반기 옥수동 극동아파트 52평은 6개월 동안 1억3천만원이 올라 서울에서 가장 많이 오른 아파트 1위가 됐다.

그렇게 서울 대표 달동네는 어느덧 과거가 됐다. 대로변에서만 보면 말이다.

20여년 동안 너무도 큰 변화를 겪은 곳, 그 사이사이 아직도 옛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곳, 옥수동을 찾았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압구정동과 마주 보고 있는 동네

옥수2동은 아파트촌이 됐지만, 옥수1동은 대부분 일반주택이다.
 옥수2동은 아파트촌이 됐지만, 옥수1동은 대부분 일반주택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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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북서쪽 인왕산 중턱에 살고 있는 나는 몇 가지 방법으로 옥수동을 찾았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신당동을 거쳐 금호터널을 지난 뒤 옥수동을 찾았고, 또 한 번은 지하철에 자전거를 싣고 금호역에서 내린 뒤 옥수동 언덕을 올랐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금호동으로 들어갔다가 금호터널 윗길을 통해 들어간 적도 있다.

금호역에서 내려 서쪽 방향으로 보이는 동네가 옥수1동이다. 옥수역 근처인 옥수2동은 대부분 아파트단지로 변했지만 옥수1동엔 아직까지 일반 주택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 아파트 단지인 옥수2동은 옥수1동에 비해 땅(1.25㎢)이 넓고 사람(1만8081명)도 많다(옥수 1동은 0.7㎢, 1만1433명).

옥수동은 옥정수(玉井水)라는 유명한 물이 있어 이름 붙은 동네다. 조선시대에는 두뭇개, 무멧개, 두물개, 두모주, 두모포 등으로 불렀다. 1911년 경성부 두모면 두모리, 1914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가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에 다시 편입돼 옥수정이 됐다. 해방 이후 일본식 행정명인 '정'을 떼고,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던 두 개 창고 가운데 하나였던 동빙고가 있던 곳이 바로 옥수동8 뚝도정수처리사업소 자리다. 서빙고는 조정에서 썼고, 동빙고는 종묘와 사직단에 제를 올릴 때 썼다.

올해 1월 19일 한강.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다.
 올해 1월 19일 한강.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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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선 매년 두 번씩 옥수동 근처 사한단에 모여 얼음이 잘 얼게 해달라고 빌었다. 날씨가 추워야 얼음 또한 제대로 어는 법이니 "이번 겨울 제대로 춥게 해달라"고 빈 셈이다. 하지만 아무리 추워도 물이 더러우면 잘 얼지 않는다고 한다. 근대 이후 한강물이 잘 얼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요즘 한강이 자주 언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옥수동 앞 한강엔 '옥수동섬'이라고 불리던 저자도가 있었다. 1970년대초 압구정동 아파트를 만들면서 그 섬 모래를 썼다. 부자들이 산다고 하는 압구정동이 옥수동에 톡톡히 신세를 진 셈이다.

금호역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처음에는 기어를 낮춰 오르다가 중간쯤부터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요즘 붓으로 그린 간판을 보기 힘들다.
 요즘 붓으로 그린 간판을 보기 힘들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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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네 유리'라는 간판이 눈에 '쏙' 들어온다. 손으로 그린 간판이 친근하다. 연필로 쓴 편지를 보는 느낌이다. '시간이 돈'인 요즘 저렇게 손 간판을 그릴 이는 거의 없을 듯 싶다.

골목길을 따라서 걸어 올라가니 이번엔 만물상회가 나타난다. '상회'라고 이름을 붙여놓았지만 거리에 물건을 풀어놓고 파는 곳이다.

자전거부터 환풍기, 녹음기, 미니전축, 전화기 등 물건이 다양하다. 제일 싼 물건은 5000원짜리 전화기, 제일 비싼 물건은 3만5000원짜리 자전거다.

담벼락엔 이불이 햇볕을 쬐고 있다. 햇볕을 가득 안은 이불이 풍기는 기운을 기계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다.

우리가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미국에서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없는 곳이 많다. 몇 달 전 한 신문에선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다.

미국의 여러 주에선 빨래를 집 뜰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못 널게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미국의 여러 주에선 빨래를 집 뜰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못 널게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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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많은 주들은 도시와 동네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빨래를 집 뜰이나 아파트 베란다에 말리는 것을 하지 말도록 요구하고 있다.…일부 주는 아예 집에 전기빨래건조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오리건주는 빨래를 밖에 널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매사추세츠주도 빨래를 집 밖에 널어두면 주민의 항의가 빗발치는 관계로 건조기로 말리도록 지도한다.…버지니아주는 주택에 세탁기는 물론이고 건조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지 않으면 주택을 매매하거나 전(월)세를 놓을 수가 없다.…빨랫줄 반대론자들은 갖가지 빨래가 주택과 동네의 미관을 해쳐 집세를 떨어뜨리고 동네를 빈촌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반론을 펴고 있다."-<노컷뉴스>(2007년 10월 8일)

미국 일부 주에선 법으로 빨랫줄 설치를 금지하기 때문에 그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빨랫줄 반대 운동이라니...딴 나라 이야기 같다. 우리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기사의 마지막 대목 때문이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돌고, 그 소문이 실제가 되면 빨랫줄 금지 법안이 만들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불과 십 몇 년 전에는 '물을 사 마신다'는 게 코미디 소재인 때도 있었다.

자동차 타는 사회와 점점 사라지는 동네 가게들

아직도 연탄이 주 연료인 집이 적지 않다.
 아직도 연탄이 주 연료인 집이 적지 않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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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 어느 집에선 연탄을 11층으로 쌓아놓은 집을 봤다. 가로 7줄, 세로 4줄쯤 되니 대략 300장 정도 된다. 이번 겨울을 저렇게 쌓은 연탄으로 나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를 맡고 할머니가 구해온 김칫국물을 허겁지겁 마셨다던 사촌형들 이야기가 생각난다..

고개를 허위허위 올라 한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서니 동호대교가 내려다보인다. 앞이 탁 트인 게 보기 좋다.

방향을 돌려 조금 더 산 쪽으로 올라간다. 학교를 마친 아이,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아주머니, 폐품을 주워서 싣고 가는 할머니가 힘겹게 산을 오른다.

아이가 올라가는 모양새를 가만히 살펴봤다. 이리저리 S자를 그리며 오른다.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가파른 산길을 직선으론 도저히 못올라가지만 S자를 그리면 올라갈 수 있다.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며 힘을 모았다가 다시 올라가고, 다시 힘을 모았다가 올라간다.

언덕을 올라갈 때 저리 올라가라고 누가 가르쳐주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저렇게 자연에 적응한다. 저러니 집과 길도 사람을 닮아 '꼬불꼬불'인 게다.

길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오르는데, 내려오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기분이 참 좋아졌다.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기가 쉽지 않은 요즘이다. 이해관계가 있을 때는 인사가 넘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외면이다. 인사 또한 양극화다.

계단의 매력
 계단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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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계단길은 가파르다.
 옥수동 계단길은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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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동네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계단이다. 아파트나 계획도시에서 볼 수 있는 규격품 계단 대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계단이 골목동네엔 가득하다. 갑자기 좁아지는가 하면 골목 귀퉁이로 '쏙' 숨기도 한다. 물 흐르는 소리라도 날 것처럼 땅 모양을 따라 흐르기도 한다.

물길이 있으면 땅길이 있는 법인데, 요즘 만드는 땅길은 자동차에 이롭다. 넓고 곧으니 자동차가 달리기 좋다. 좁고 굽은 골목동네 길은 자동차엔 불편하지만, 사람에겐 안전하다.

오르막길을 따라 계속 오르니 매봉산 팔각정이 나온다. 해발 172m다. 옥수동 매봉산 팔각정은 인근 금호4가동 달맞이봉과 함께 지난해 서울시 '우수경관 조망장소'에 뽑혔다.

매봉산은 성동구와 중구, 용산구가 둘러싸고 있다. 매봉산 꼭대기엔 지난 한해 학교가 없어진다고 해서 네티즌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았던 동호정보고등학교가 있다.

동호정보고 후문 쪽엔 아주 오래된 가게가 하나 있다. 가게 밖은 장판지를 둘렀고, 빈틈마다 온갖 글씨를 써놓았다. 두부, 콩나물, 막걸리, 슬리퍼를 판다는 홍보글도 있지만, '동호공고 학생들 가게 앞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글도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게 안에도 온갖 글들이 적혀 있다. 학생들이 자주 이용하는 가게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던 곳,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해

매봉산 꼭대기에 있는 가게
 매봉산 꼭대기에 있는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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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게 주인이 이 가게를 인수한 것은 4년 전. 한 때는 이 가게가 무척 장사가 잘 됐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기면 꼭대기 공터에 모여 잔치를 벌였단다. 돼지도 잡고, 가게에서 술도 사서 함께 나눠 마셨단다.

재개발이 되면서 토박이들이 동네를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가서 물건을 사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꼭대기 가게는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던 곳은 지금 주차장이 됐다. 자동차가 빼곡히 들어찬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던 모습을 상상해봤다.

사람들은 정을 나누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그런 세상과 멀어지고 있다. 가게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처럼 '편리함'과 '정'을 그렇게 조금씩 맞바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옥수동은 계속 바뀌고 있다. 재개발지역 번호는 이미 두자릿수로 접어들었다. 지금껏 변화보다 더 많이 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과정에서 누구는 들어오고 누구는 떠난다. 지금 강화도에 살고 있는 시인 함민복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 동네서 살았다.

하늘 아래 첫동네라 불리던 곳에서 꿈을 키웠던 사람들…. 그때 그들은 지금도 옥수동에서 계속 꿈꾸고 있을까. 문득 <서울의 달>에서 나왔던 홍식이, 춘섭이, 영숙이, 호순이가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그 외 수많은 조연들도.


태그:#옥수동, #골목, #자전거, #미니벨로, #서울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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