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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표지
ⓒ 중앙출판사
어린이 책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에는 두 할머니가 나온다. 한 할머니는 주인공 안디의 상상 속에서 만나는 ‘사과나무 할머니’이고, 또 한 할머니는 옆 집 다락방으로 이사 온 ‘핑크 할머니’이다.

집 앞 사과나무에 올라가 놀길 좋아하는 안디는 할머니 자랑을 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만 하다. 할머니가 한 분도 없는 자기 처지에 속상해 하던 중 사과나무 위에 나타난 할머니를 만나게 된 안디는 ‘사과나무 할머니’랑 놀이공원에 가기, 말 타기, 돛단배 타고 인도에 가기 등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게 된다.

할머니의 차는 레버 하나로 침대가 만들어지고 햇볕이 뜨거우면 양산을, 비가 오면 우산을 펼 수 있도록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버튼을 누르면 음료수는 물론 간식까지 저절로 나온다. 또한 할머니의 지갑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그러니 할머니는 못하는 일도 없을 수밖에. 그러나 ‘사과나무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안디의 눈에만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안디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핑크 할머니’를 우연히 도와드리게 된다.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아직 직접 돈을 벌어야 하는 할머니 옆에서 안디는 어쩌다 집안 정리도 해 드리고, 장도 봐드리고, 음식도 만들어 드린다.

자기가 맡은 집안일을 빼먹기 일쑤인 개구쟁이 안디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할머니의 힘이다. ‘핑크 할머니’는 무슨 이야기든 다 귀 기울이고 눈 맞추며 들어주시고, 안디가 하는 일에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안디가 불평이라도 늘어놓을라치면 야단을 치거나 섣불리 타이르지 않고 가만 듣고 계시다가 해결할 수 있는 힌트를 슬쩍 던져주시곤 한다.

‘핑크 할머니’에게 마음이 열린 안디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사과나무 할머니’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안디는 문득 뭐든지 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는 ‘사과나무 할머니’보다는 몸도 아프고 외로운 ‘핑크 할머니’에게 자기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이 동화의 미덕은 안디가 상상 속 ‘사과나무 할머니’를 완전히 잊고 현실 속 ‘핑크 할머니’만을 따르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할머니가 둘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지 않니?” ‘핑크 할머니’의 말씀대로 상상과 현실은 안디에게는 모두 소중한, 지금 내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다.

제목에 드러나 있는 ‘사과나무 할머니’보다 ‘핑크 할머니’가 내 마음에 더 다가왔던 것은 할머니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 때문이었다. 남의 도움을 당연하고도 뻔뻔스럽게 기대하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진심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자연스러움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노년에 볼 수 있는 당당함과도 통한다.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 가운데 하나로 ‘끝까지 삶에 참여’하는 자세를 꼽을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노년에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도움을 받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도와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몸이 불편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론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받으면서 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 맺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책 속의 ‘핑크 할머니’의 매력은 작은 키도, 둥글둥글한 몸집도, 하얗게 센 머리도, 친절하게 보이는 갈색 눈도 아니다. 할머니의 매력은 바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채우면서도 끝까지 잃지 않는 편안한 당당함이며, 어린아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나누는 인간적인 만남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둘째 아이가 강력 추천해서 읽은 동화에서 아름다운 할머니의 모습을 만나고 나니 저절로 잘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동화를 다 읽었는지를 수시로 확인하던 아이가 어젯밤에는 책을 다 읽었다는 이야기에 베개를 가져와 내 옆에 눕더니 자기가 머릿속에 그려본 ‘사과나무 할머니’의 모습을 지치지도 않고 들려주었다. 동화를 읽는 일은 이렇게 여러 가지 선물을 내게 남겨주곤 한다.

덧붙이는 글 | (사과나무 위의 할머니, Die Omama im Apfelbaum / 미라 로베 글, 수지 바이겔 그림, 전재민 옮김 / 중앙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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