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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간은 누구나 오늘의 일상이 내일도 변함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살고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일은 오늘처럼 아무 일 없이 반복되고 있다. 오늘 이 순간 이 세상과 유명을 달리하는 불운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런데 누구든지 막상 오늘의 일상이, 너무나도 친근한 일상이 지금 현재 시간에 멈출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당사자는 어떠할까?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운명이 나에게 꿈같이 바람같이 도둑맞은 듯이 닥쳐왔던 그 황당했던 경험을 지금 담담하게 엮어본다.

12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아내는 아직 늦잠에 빠져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시대 직장인들에게 일요일 아침은 늦잠을 잘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다. 아파트 창문은 아직도 어슴푸레한게 늦은 시간은 아닌 듯했다. 일요일은 여간해서 깨우지 않는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놀라 잠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내는 자신의 겨드랑이에 임파선이 부었다며 만져보라는 것이다. 과연 겨드랑이 부분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신체의 어느 한 부위에 상처가 생기면 중요 신체 부위의 감염을 막기 위해서 제일 먼저 임파선에서 병원균을 차단시킨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의학상식이다. 속칭 몽오리라고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겨드랑이 임파선은 5백원짜리 동전만한 크기로 부어 있었고, 만져보니 딱딱했다. 아내는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처남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손위 처남은 지방의 종합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다. 늘 우리 가족이 어디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보다 처남에게 먼저 진료상담과 동시에 처방을 받곤 했다. 우리 집에는 각 증상별로 처방해준 상비약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날 오후. 아내는 처남에게 전화를 했다.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런데 전화통화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평소에는 안부전화만 주고받던 터라 통화시간이 길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의사로서 처남의 소견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단순 염증일 수도 있지만 세포검사를 해 봐야 한다는 거였다.

순간 머릿속이 아찔했다. 세포검사는 곧바로 조직검사가 아니던가? 조직검사는 보통 암이 의심될 때 하는 게 아닌가? 아내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아내는 결혼 초부터 몸이 약해 늘 고생해 왔다. 약을 달고 사는 형편이었다.

사실 아내는 겨울이 접어든 지난 한 달 동안 계속 감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평소에 아내는 몸이 약해 늘 힘들어 했고, 보약으로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아내에게 딸아이와 아들은 잠보라는 별명을 붙였을 정도다. 그런데 만병의 시작은 감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민간의학 상식이다. 문득 겁이 났다. 큰 병은 아닐까?

3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둔 외사촌 동생이 감기를 한 달 간 앓다가 동네 병원을 갔더니 의사선생께서 심상치 않다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으라고 해서 대학병원에 갔는데 그게 동생의 마지막이었다. 동생은 입원하자 마자 백혈병 진단을 받고 며칠 살지 못하고 바로 사망했다. 자기발로 병원에 걸어 들어 갔다가 다시는 걸어 나오지 못했다.

최근에는 직장 동료 중 한명은 한 달 간 감기로 고생하다가 잘 회복되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2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최근까지 주변에서 일어났던 이런 저런 사건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는 나에게 다시 처남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다시 자세히 물어 보라는 거였다.

“형님! 아내의 증상이 무엇입니까?”
“단순 염증일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아닐 경우에는 무엇입니까?”
“임파선이나, 골수 쪽이 잘못이 있을 수도……” 말끝을 흐렸다.

내 눈앞의 안경이 흐려졌다. 손이 떨려, 그냥 수화기를 바닥에 놓쳤다. 마치 내가 드라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처남은 당장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늘 허약해서 약을 달고 사는 동생의 처지를 잘아는 처남의 배려였다. 사실 집 가까운 종합병원에 갈 수도 있지만, 별도의 입원 수속 걱정 없고, 처남이 알아서 진료 일정을 잡아줄 것이고 오히려 집 가까운 종합병원보다 시간상으로 더 절약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내 종합병원의 경우 곧바로 진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료 상담해서 예약 날짜를 잡고 하다보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에겐 지금 심리적 안정이 필요했다. 다행히 KTX가 있으니까 지방이라고 해도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다.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아내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다음날 처남이 근무하는 지방의 종합병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몇 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없이 허둥거리며 보냈던 것 같다. 아내가 혹시 몹쓸 병이라도 걸렸다면, 아니 얼마 못사는 불치병이라도 걸렸다면……. 한 달 간 감기를 앓았고, 여러 정황을 판단해 보니 분명 아내는 중병을 앓고 있음이 틀림없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졌다. 눈앞이 깜깜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제일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된 딸아이와 이제 막 6살인 아들이었다. 아들은 지난 9월에 할머니의 품을 벗어나 우리 집에서 함께 산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느라 장모님께서 봐주셨던 것이다. 6살 아들은 엄마의 사랑도 받아 보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엄마 없이 자라야 할 아이들이 불쌍했다. 6살 난 아들에게 그리고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에게 엄마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나는 그동안 아내가 아파서 돌보지 못한 부엌에 밀린 설거지를 했다. 아내는 딸아이에게 유언처럼 “예윤아 네가 동생을 잘 돌봐야 한다”라고 하자 딸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듯했다. 나는 옆에서 당신은 왜 쓸데없는 소리로 애를 울리느냐며 타박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 왔는데……. 아내 또한 착하기 거지 없이 살아왔는데……. 누구에게 잘못 한 게 없는데 이런 일이 나에게 닥치다니……. 아내도 울고, 나도 울고, 딸아이도, 아들도 울었다. 집안은 울음 바다로 변했다. 우울한 기운이 온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분위기란 게 이처럼 묘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기분이 단 하나의 사건으로 이처럼 180도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혹시 꿈은 아닐까?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고 난 후 깨어나서 휴! 하고 한숨지었던 그런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분명 꿈은 아니었다.

어쨌든 다음날 처남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내려가야 했다. 광주행 고속열차를 인터넷으로 예매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컴퓨터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당황하여 허둥지둥 하다보니 스위치를 누른 게 아니라 엉뚱하게 CD 스위치를 계속 눌러댔던 것이다.

전원은 들어 왔지만 막상 자판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자판 글씨가 작은 거지! 속으로 불평했다. 평소에 그렇게 잘 보이던 자판글씨가 보이지 않다니, 나는 그제서야 컴퓨터 자판이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서 겨우 광주행 고속열차 왕복편을 예매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생각 가운데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애써 가져 보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그래! 아마 단순한 염증이겠지!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 보기로 했다.

저녁 때가 되자 외출 중이었던 처제가 들어왔다. 처제는 우리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아내는 처제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처제는 우리집 근처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다.

명색이 치과 의사라 먼저 처제에게 그동안의 경과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내의 겨드랑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처제의 소견으로는 이건 단순염증이라는 것이다. 거의 확실하다는 거다. 그래도 나와 아내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이게 단순염증이란 말인가? 오히려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의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이게 분명 뭔가 이상한 증상이라고 확신했는데 단순염증이라니! 처제는 곧장 처남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오전까지 만해도 겨드랑이 주변에 붉은 색이 없었는데 처제가 들어왔을 때 보니까 부어오른 중앙에 붉은 점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급속하게 부어 올라있었다. 이것을 근거로 처제는 단순염증이라고 했다. 처남도 그제서야 단순 염증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오늘밤을 지나고 나서 경과를 보면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내의 겨드랑이는 더 심하게 부어올랐다. 단순염증이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반가웠다. 그리고 한순간에 집안은 의심스럽지만 평화가 찾아왔다.

지금 아내는 겨드랑이에 큰 혹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혹 속에 든 고름을 짜내느라 무척 고생하고 있다. 많이 아픈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단순염증으로 결론이 나서 온 가족의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나와 아내 그리고 딸아이는 많이 놀랐다. 그리고 아내는 지금도 몸이 약하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당신이 분명히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니까 걱정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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