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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혜, 흑임자, 순댓국... 이 맛있는 걸 그동안 왜 어르신들만 먹었을까요? 젊은이들이 예스러운 우리 고유의 음식에 푹 빠졌습니다. 이른바 '할매 입맛'을 가진 밀레니얼 세대가 늘어나면서, '할매니얼'(할매+밀레니얼)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입니다. '할매니얼 가이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맛깔나는 우리 음식, 숨겨진 맛집, 나만 아는 노포 등을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편집자말]
인천은 항구다. 뭍길보다 물길이 먼저 열렸다. 육로가 변변치 않은 시절 사람들은 배를 타고 와 인천항에 내렸다.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로 갔지만 가던 걸음 멈추고 인천에 눌러 앉은 사람도 꽤 있었다. 그렇게 전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지금은 본토박이보다 훨씬 많다. 선거를 하고 나면 전국 평균 득표율은 인천 평균과 같다. 인천은 작은 대한민국이다.

유입 인구 중 충청도 사람들이 가장 많다. 서해를 함께 끼고 있어 일찍이 뱃길이 발달해 있던 덕이다. 당진, 서산, 태안 같은 바닷가 마을 출신들이 그중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충남 내륙이나 충북사람들도 같은 뱃길을 따라 꽤 많이 인천에 왔다. 지금도 인천시민 열이 모이면 그 중 서넛은 충청도 출신이고 그들의 절반 이상은 서태진(서산, 태안, 당진) 사람들이다.

머릿수가 많으니 인천지역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조직력도 탄탄하다. 충청도민회와 충남향우회가 큰 줄기가 되어 각 군, 구별로 하부지회를 두고 있다. 충청도 내 시군별 향우회 조직도 따로 결성되어 있다. 도내 거의 전 도시를 망라한다. 이들이 체육대회라도 하면 지역정치인들이 총출동한다. 인천시장을 비롯해 국회의원 등 충청도 출신 선출직도 부지기수다.

충청도 사람들은 유순하다. 전혀 호전적이지 않다. 양반의 고장답게 점잖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말수도 적고 과묵하다. 잘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네들의 속내를 잘 모르겠다는 말도 있다. 그들 스스로도 '모호하고 의뭉스러울지언정 음흉하지는 않다'고 표현한다(<의뭉스러울지언정 음흉하진 않아유>, 이재표, 충북학 20집, 2018)

인천에 둥지를 튼 충청도 사람들도 그랬다. 현지 토박이들과 별 분란 없이 잘 어울려 살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인천사회 전반에 걸쳐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전통과 정서 등은 단지 인천의 하위문화(subculture)에 그치지 않았다. 인천의 현지문화와 결합해 독특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만들어 냈다. 이른바 인청(인천+충청도)식이다.

음식도 그렇다. 충청도 음식은 대체로 소박하고 간이 세지 않다. 예로부터 죽이나 국수, 수제비 등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런 식문화 전통이 인천에도 연착륙했다. 굴이나 조갯살로 끓이는 해물칼국수는 하나의 전형이 됐고, 예산이 유명한 어죽은 인천식 고추장 추어탕으로 변신했다. 어리굴젓, 황새기젓 등 젓갈문화는 인천 현지식과 결합해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천안병천이 유명한 충청도식 순댓국도 그 중 하나다. 그곳 순대는 당면과 야채, 선지 등을 골고루 쓴다. 순댓국은 순대와 머리고기, 각종 돼지부속을 함께 끓여 얼큰한 다짐과 들깨를 얹어 내는 게 일반적이다. 보기에도 푸짐하고 맛깔스럽다. 병천시장 인근 돈육가공공장에서 나오는 내장 등의 부속물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리 잡은 방식이라고 한다.

인천식 순댓국은 따로 알려진 전통적 방식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인천에서 오랫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화순대나 시정순대집의 경우를 보면 고기나 내장보다는 순대가 위주다. 끓일 때부터 미리 간을 하고 밥을 토렴해 따끈하게 내준다. 간이 되어 있으니 고명으로 따로 얹는 것도 없다. 순대도 당면이 대부분이다. 병천식에 비해 간결하고 깔끔하다.

순댓국의 전통을 재현하는 부평시장 '충남순대'
 
부평시장 충남식당의 순댓국 보기에도 맛도 터프하기 그지 없다. 어릿고기부터 부속물까지 돼지 한마리가 다 들어 있다.
▲ 부평시장 충남식당의 순댓국 보기에도 맛도 터프하기 그지 없다. 어릿고기부터 부속물까지 돼지 한마리가 다 들어 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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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 십정동에는 도축장이 있다. 막 잡은 소와 돼지고기가 부평시장을 통해 팔려나간다. 선지를 비롯한 가축들의 부속물도 흔했다. 시장 뒷골목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순대골목이 형성됐다. 많을 땐 30여 곳이 넘었다. 새 시장이 생기고 구 시장 재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다 빠져나가고 한 집만 남았다. '충남순대'집이다.

이 집 주인장은 도점례 여사다. 물론 명의야 남편 앞으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경영과 주방을 책임지고 있다. 도 사장은 충남 논산 출신이다. 가게는 30년 전에 인수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추석과 설 딱 이틀만 쉬고 1년 363일 문을 열었다. 그렇게 장사만 하면서 아이들 다 키웠다. 

충남 출신답게 이 집 순댓국의 베이스는 병천식이다. 볼살, 귀때기 등 머리고기에 오소리감투(위장), 곱창 같은 부속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나온다. 밑간은 기본만 되어 있다. 조금 짜게 먹는 사람들은 새우젓이나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할 정도다. 미리 말하지 않으면 칼칼한 다짐 양념이 올려 나온다. 들깨도 이미 들어가 있다. 국이 나올 때부터 고소한 향이 그윽하다.

그러니까 이 집 순댓국은 병천식을 기본으로 점례식 방식을 더한 셈이다. 들깨를 많이 써서 풍미를 더하고 냄새도 잡는 방식이 그렇다. 들깨는 향이 강해 호불호가 비교적 확연하게 갈린다. 그 때문에 다른 집에서는 선택사항으로 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게 이 집에서만큼은 필수다. 비주얼처럼 맛은 터프하다. 국물은 진하고 걸쭉하다. 절로 소주가 당긴다.

"이 장사는 아무나 하지 못해요. 재료 손보고 육수 만드는데 하루 24시간을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해요. 나는 지금껏 30년 장사하면서 원가가 얼마 들어가는지도 몰라요. 그저 우리 집 찾아오는 분들 배부르게 따뜻한 한 끼 대접한다, 배고픈 분들 위해 봉사한다, 그런 마음으로 장사했지 돈 욕심은 조금도 없었어요."

이 골목에서만 30년이다. 후회는 없다. 그런데 주변에서 함께 장사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 섭섭하고 외롭다. 사실 이 집 찾아가려면 어느 정도 마음의 다짐을 해야 한다. 20여 미터쯤 되는 골목에 불 켜진 집은 이 집뿐이다. 나머지는 셔터조차 열지 않는다. 골목 분위기가 음산하다. 재개발 탓이다. 그래도 변함없이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 고맙다.

지금은 코로나로 뜸하지만 한창 때엔 자리가 없어 돌아가는 손님도 많았다. 주인장의 고충을 헤아려 이 집 마니아들은 바쁜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난다. 대부분 혼자다. 그들은 저마다 순댓국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앞에 놓고 비장한 표정으로 혼밥, 혼술을 한다. 그들 덕에 가게는 한 시도 쉴 틈이 없다. 그들은 만약 이 집이 문을 닫는다면 당장 머리띠라도 묶을 태세다.

이것은 곰탕인가, 순댓국인가? 신기시장 '청주식당'
 
주안동 신기시장 내 청주식당 순댓국 순댓국이 아니라 곰탕이다. 머릿고기만 얌점히 들어 있다. 순대는 따로 내 준다. 맛보기다. 이런 순댓국은 일찍이 없었다.
▲ 주안동 신기시장 내 청주식당 순댓국 순댓국이 아니라 곰탕이다. 머릿고기만 얌점히 들어 있다. 순대는 따로 내 준다. 맛보기다. 이런 순댓국은 일찍이 없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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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동 신기시장 내 청주식당은 집단경영체제다. 은예, 은순, 은영 정씨 가문 세 자매가 힘을 합해 가게를 냈다. 큰언니 은예씨가 주방, 둘째 은순과 막내 은영씨가 홀과 카운터를 번갈아 담당한다. 16년 전 가게를 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 자매는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사람인지라 서운할 때도, 야속할 때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티 내지 않았다. 소문난 의좋은 자매들이다.

가게 이름은 청주지만 이들은 의외로 인천 토박이다. 지금은 다리가 생겨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섬, 영종도가 고향이다. 오래 전에는 그저 한적한 섬마을이었는데,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매립해 국제공항을 만들면서 일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때 정가네 자매들은 함께 뭍으로 나왔다. 그 이전부터 식당을 했던 큰 언니의 제안으로 순댓국집을 하게 됐다.

청주식당의 순댓국은 얼핏 순댓국처럼 보이지 않는다. 곰탕 같다. 국물은 말갛다. 아무런 간이 되어 있지 않다. 다진 양념도 따로 나온다. 손님들은 저마다의 식성에 맞춰 간을 해야 한다. 건더기도 그렇다. 순대는 안 보인다. 흔한 곱창 같은 부속물도 하나도 없다. 살코기만 얌전하게 담겨 있다. 냄새도 없고 맛조차 돼지 같지 않다. 일찍이 이런 순댓국은 없었다.

전에 장사하던 청주분이 전해주신 비법에 영종도식을 접목시켰다. 돼지 내장이나 순대는 일절 배제하고 머리고기만 넣는다. 육수도 그것만 고아 만든다. 그러니까 말이 순댓국이지 실은 돼지머리국밥이다. 이름에 순대를 넣었으니 영 모른 척 할 수는 없어 순대 네댓 개를 따로 내준다. 순대는 인천식이다. 선지를 섞은 당면만 넣는다. 보기에도 맛도 깔끔하다.

"고향 영종에서 어느 집에서 잔치하면 이런 식으로 국을 끓였어요. 돼지를 잡으면 머리만 따로 삶아 국물을 냈지요. 다른 거 다 해봐도 그게 제일 깔끔하고 맛나더라고요. 그걸 응용한 거죠. 하루에 보통 10마리 이상씩 푹 고아요. 간도 그래요. 우리가 어떻게 손님을 알아요. 짜게 먹을 수도 싱겁게 먹을 수도 있는데. 다 자기 식성대로 해 드시라는 거죠."

청주는 충북이다. 충북 음식은 더 덤덤하다고 한다. 거기에 영종식 돼지국밥 레시피를 가미한 거다. 그 결과 훨씬 참하고 부드러운 명품 순댓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 청주식당이야말로 인천과 충청도가 제대로 만난 경우다. 둘이 완벽한 하나가 된 셈이다.

신기시장 순대골목엔 청주식당 말고도 비슷한 집이 십여 개다. 저마다의 맛과 전통을 자랑한다. 느낌도 맛도 다 다르다. 단골들의 취향도 갈린다. 독점적 경쟁시장의 전형이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치열하다. 하지만 이들은 다투거나 반칙을 쓰진 않는다. 호객행위도 없다.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각자의 솜씨로 고객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다.

함께 사는 지혜를

몇 년 전부터 프랜차이즈 순대 식당이 크게 늘었다. 그 덕인지 과거엔 일종의 혐오식품 비슷하게 취급당하던 순댓국의 인기가 상종가다. 젊은층도 꽤 즐겨 먹는 듯하다. 솔직히 그 가격에 그만큼 영양가 높은 음식이 또 뭐가 있을까. 가성비로만 보자면 최고의 한 끼다. 거기에 인천의 순댓국은 지역 저마다의 특색을 담고 있다. 가히 대한민국 대표 순댓국이다.

1 더하기 1은 2보다 크다. 조화와 협력의 힘이다. 인천과 충청도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어우러져 살아오면서 그 위력을 절감해 왔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했으며 때로 양보하고 배려했다. 그런 슬기로운 지혜가 순댓국 한 그릇에도 담겨 있다. 저마다 편 갈라 싸우기 여념 없는 세상이 참 안타깝다. 그분들 모두 인천에 와 순댓국 한 그릇씩 나눠 드시면서 공존의 정신을 되새겨보시길 바란다. 아주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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