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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후 일을 쉬고 있다. 직장 다닐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집안일이 온종일 집에 있으니 어찌 그리 눈에 자꾸 들어오는지 신기한 일이다. 부엌에 갈 때마다 가스레인지 기름때, 후드 기름때가 눈에 걸려 미루고 미루다 어쩔 수 없이 청소를 한다. 주방 세제를 뿌리고 베이킹소다를 뿌리고 뭔가 부족한 것 같아 구연산도 뿌렸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붓고 못 쓰는 칫솔로 가스레인지와 주방 후드를 닦는다.

집안일은 참 보람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청소도, 빨래도 하면 원래 그랬던 듯 티가 안 나지만 한 번만 안 해도 더러운 티가 바로 난다. 가스레인지를 아무리 반짝반짝 닦아도 칭찬받기는커녕 내가 말하기 전에는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열심히 한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내 경력이 쌓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집에서 놀면서 뭐하냐'는 말을 듣기 일쑤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에 안 할 수도 없다. 가스레인지, 주방 후드 기름때를 닦다 보면 별생각이 다 든다. 그러다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평생 장사를 했다. 장사하면서 나와 내 동생, 아빠 챙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쩌다 한번 가스레인지 기름때 닦는 것도 이리 억울한데 엄마는 억울하지 않았을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장사하고, 자식 둘 챙기고, 일요일엔 밀린 집안일 한다고 하루도 마음 편히 쉰 날이 없었다는 걸 30대 중반이 훨씬 넘어서야, 임신을 해서야 깨닫는다.

일요일마다 겪어야 했던 엄마의 짜증
 
 KBS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의 한 장면
 KBS 주말드라마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의 한 장면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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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엄마가 빨래와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일요일마다 엄마는 온갖 짜증을 내면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우리 밥도 챙겼다. 어릴 때는 '왜 그렇게 짜증을 내냐'며 '그럴 거면 하지 말든가'라고 엄마를 향한 불만을 속으로 삭였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어릴 때 내 눈에는 안 보이는 집안일들이 엄마 눈에는 계속 보였을 것이고, 엄마에게는 할지 말지를 선택할 권한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합리하지만, 그 당시 엄마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었다. 식구는 네 명이었지만 집안일을 할 사람은 엄마뿐이었다. 엄마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짜증을 내면서라도 그 일들을 해야 했던 것이다.

엄마는 비록 혼자 짜증을 낼지언정 나와 내 동생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딸한테 집안일을 시키면 나중에 결혼해서도 일 많이 하게 된다'고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다'며 나와 동생에게 직접 뭘 하라고 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6일 내내 밤늦게까지 장사하고, 하루 쉬는 일요일에 혼자 집안일을 하면서 엄마는 몸도 마음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도 딸 둘에게 차마 '청소해라' '빨래해라'라는 말을 못 하고 혼자 짜증 내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릴 때는 그렇게 싫었던 일요일 엄마의 짜증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 짜증조차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집안일을 많이 하며 살지 않는다. 남편이 집안일에 적극적인 사람이라 가사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고 있다. 요리를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아 요리도 남편이 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설거지 및 정리를 주로 한다. 둘 다 계속 일을 했으니 같이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현실 세계에선 이것이 꼭 당연하지만은 않다. 그러니 엄마의 믿음인 '딸한테 집안일 시키면 커서도 일 많이 하면서 산다'는 실현된 셈이다. 엄마의 일요일 짜증 덕분에 내가 좀 더 편안하게 살게 됐다면 그건 너무 비약일까.

어릴 땐 그렇게 싫었던 매주 일요일 엄마의 짜증이 지금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 우리 집에서 제일 피곤한 사람은 엄마였을 텐데 난 왜 짜증 내는 엄마만 보고, 힘든 엄마는 보지 못했을까. 짜증 내는 게 싫다고 생각만 할 게 아니라 같이 할 생각은 왜 안 했을까. 내심 자식들이 같이해주기를 바랐을 텐데 난 왜 그리 모른 척만 하고 있었을까.

임신을 하고 나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임신하고 나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임신하고 나서야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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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하고 엄마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밤이 되면 비염에 식도염에 치골통 등으로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럴 때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도 나를 임신했을 때 이렇게 아팠을까. 집에서 밥 차려 먹기가 너무 귀찮을 때도 엄마 생각이 난다. 내 밥 챙겨 먹기도 이렇게 귀찮은데 장사하면서 식구들 밥까지 챙기느라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기도하면서 또 엄마 생각을 한다. 엄마도 나를 만나기도 전부터 이렇게 나를 사랑했을까.

엄마는 늘 나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알아서 잘 커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 거짓말이다. 아이는 절대 혼자 클 수가 없다. 엄마의 넘치는 사랑으로 내가 자랐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왜 진작 몰랐는지 모르겠다. 내 한 몸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딸은 임신을 하고 나서야 엄마의 큰 사랑을 깨닫는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엄마 생각을 더 자주, 더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내가 아이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것들을 계속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아이를 품고 낳아 키우는 시간은 엄마를 이해하고 생각하는 시간이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면서 아이와 함께 성장해 나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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