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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 어실각 통일 신라 시대에 지어진 천년사찰 고령산 보광사의 가을 ⓒ 변영숙
     
보광사 가는 길은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됫박만큼이나 가팔라서 됫박고개인 이 고갯길은 아슬하면서도 풍광이 좋아 파주의 한계령, 파주의 소금강이라 불린다.

고령산 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보광사는 통일신라 시대 진성여왕 8년에 왕명으로 도선국사가 지은 절이다. 경기도 파주, 양주, 고양시에 걸쳐 있는 고령산은 해발 600m를 조금 넘을 뿐이지만 일찍부터 높고 신령스러운 산으로 불렸다. 그만큼 산새며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보광사 단풍을 본 이후 해마다 가을이면 보광사를 찾을 정도로 보광사 단풍은 곱다. 해탈문에서 시작되는 보광사 단풍은 부도전 근처를 노랗게 물들인 후 도솔천을 타고 올라가 미륵불 영역에서 절정을 이룬다.  
     
보광사 미륵불 일대 - ⓒ 변영숙
   
보광사는 전나무 숲 안쪽 담장 사이에 난 나무문으로 들어서야 제 맛이다. 돌계단에 올라서면 돌연 넓직한 절 마당과 정갈하게 자리잡은 대웅보전, 석등, 응진전 등이 나타난다. 만세루 툇마루에 앉아 머리 위에서 헤엄치는 커다란 목어와 국화로 한껏 단장한 앞마당을 보며 느긋하게 가을을 즐기는 맛이 그만이다. 
 
또 하나 보광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나무 숲이다. 입구와 절 뒤편에 시원하게 뻗어올라간 푸른 전나무 숲이 휴양림 못지 않다. 내처 도솔암이나 정상인 앵무봉까지 올라도 좋다.
 
보광사 전나무 쉼터 - ⓒ 변영숙
 
보광사, 영조의 효심으로 물들다
    
보광사 어실각 영조는 보광사를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 어실각을 지어 생모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셨다. 그 옆에는 자신을 대신해 향나무를 심어 어머니를 지키게 하였다. ⓒ 변영숙
     
보광사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어패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1724년 왕위에 오른 영조는 1753년 고령산 팔일봉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격상시키면서 인근에 있던 고령사(지금의 보광사)를 소령원의 원찰로 삼고 어실각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어실각 옆에는 자주 찾아올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하여 향나무를 심었다. 

지장전 뒤편 언덕에 어실각과 300여 년 전 영조가 심은 향나무가 변함없이 나란히 서 있다. 암투와 모략으로 가득한 구중궁궐에서 궁녀 출신 후궁의 처지가 어떠했을지, 아들을 지키고자 하는 어미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런 어미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두 모자의 절절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하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충무위 부사과를 지낸 최효원과 남양 홍씨의 딸로 여경동 서학동(현재의 서울 세종로 일대)에서 태어났다. 4살 때 고아가 되어 7살 때 침방 나인으로 입궁하였다(최씨의 신분에 대해서는 침방 나인설과 무수리설이 있다).  

숙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최씨는 숙종 19년(1693년)에 내명부 종 4품의 숙원으로 책봉되었다. 최씨는 모두 세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두 아들은 어려서 사망하였고, 숙종 20년(1694년)에 훗날 영조가 되는 둘째 아들 연잉군 금을 낳았다. 숙종 25년(1699년)에 내명부 최고 품계인 정 1품에 해당하는 숙빈에 봉해졌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사망한 후 왕비 후보 1순위였던 숙빈 최씨는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숙종은 숙빈을 총애하면서도 연잉군을 낳은 숙빈 최씨가 서인의 새로운 영수로 떠오르면서 노론세력의 지지를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소론에서 새로운 왕비를 간택하였고 내명부를 새롭게 개편하여 숙빈 최씨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권력의 세계란 얼마나 비정한가.

숙빈 최씨는 암투와 모략이 난무하는 궁궐에서 신중하게 처신하며 죽을 때까지 숙종에게 성심을 다하며 정쟁에서 연잉군을 지켜냈다. 숙빈 최씨는 숙종 38년(1712년)에 가례를 올리고 19세가 된 연잉군과 함께 창의궁으로 출궁하여 숙종 44년(1718년) 40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숙빈 최씨, 우여곡절 끝에 소령원에 묻히다
 
후궁 소생의 왕자는 중궁전 왕비의 아들로 입적되는 까닭에 왕자의 신분이었던 연잉군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숙종과의 갈등과 관료들의 비협조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조선의 궁중 법도상 왕자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피발과 거친 생포로 만든 최복을 입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데 연잉군은 이 법도를 어기고 피발과 최복을 입었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은 죄인이라 하지 않은가. 연잉군으로서는 마땅한 처사였지만 숙종의 심기를 건드렸음에 틀림없다. 

장지를 둘러싸고도 숙종과 연잉군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숙종은 연잉군이 처음 장지로 정한 석관동 묵장산을 왕릉터로 정한 곳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장지로 정한 경기도 광주 세동은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소 경내라는 이유로 불허되었다. 

그 다음 장지로 정한 양재동 장지는 집주인과 계약까지 맺었건만 헌릉이 보인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연잉군은 지관 목호룡과 김원명 등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양주군 고령동 웅장리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지금의 소령원이 있는 자리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국왕의 사친에 대한 제사는 국가 의례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잉군은 어머니의 제사도 지낼 수가 없었다. 비록 국법이라 하나 연잉군이 국왕이자 아버지 숙종에 대해 느꼈을 서운함이 어떠했을지 또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영조, 왕위에 오르자마자 숙빈 최씨 추승 서둘러
  
보광사 대웅보전 보광사 대웅보전에는 영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중수하고,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썼다. ⓒ 변영숙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숙빈 최씨의 추숭을 서둘렀다. 국법에 매여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던 영조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여기에 생모의 미천한 신분에 대한 열등감이 더해져 생모의 추승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영조는 즉위한 해인 1724년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짓고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셨다. 영조 20년(1744년)에는 사당의 지위를 격상해 '육상'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영조 29년(1753년)에는 '육상궁'으로 격상시켰다(조선시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된 인물을 낳은 후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을 '궁'이라 한다. 청와대 서쪽에 7명의 후궁의 신위를 모신 '칠궁'이 있다).

양주 웅장리(지금의 파주 광탄면)에 있는 묘 역시 '소령묘', '소령원'으로 격상시키고 홍살문, 정자각, 비각 등을 조성하고 인근의 보광사를 원찰로 삼아 원을 돌보게 하였다. 보광사에 숙빈 최씨의 위패가 모셔진 연유이다. 
 
영조는 보광사에 향나무를 심은 외에도 대웅보전과 만세루를 중수하게 하고 대웅보전의 현판도 직접 썼다. 소령원과 칠궁은 비공개 지역이지만 사전에 방문 신청을 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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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행작가협회준회원, NGPA회원 저서: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