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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육, 정답은 아니어도 해법은 될 수 있다.'

이 글귀에 꽂혀 책을 집어 들었고, 무릎을 쳐가며 두어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참담한 우리 교육 현실의 원인과 현상을 꿰뚫고 있을뿐더러 명징한 해법까지 제시하는 저자의 탁견에, 명색이 26년 차 교사로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단언컨대, 우리 교육의 지표로 삼을 만한 책이다.

얼마 전 김누리 중앙대 교수가 쓴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가 출간됐다. 지난 2019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여러 방송의 교양 프로그램과 특강에서 강의한 내용을 그러모은 책이다. '불행한 우리 아이들을 살리기 위하여'라는 머리말의 제목부터 교사에겐 죽비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는 우리 교육의 부끄러운 민낯을 까발린 뒤 원인을 진단하고, 3부는 독일 교육의 변천사와 성과를 소개하며 '정면 교사' 삼을 것을 주문한다. 4부와 5부에서는 '교육 혁명'의 주체를 설정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당혹스러울 만큼 신기했던 독일의 교육
 
중앙대 김누리 교수
 중앙대 김누리 교수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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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두 아이를 대학 진학 대신 독일로 유학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어선지 이 책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몇 해 전 가족과 함께 독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아이들도 독일 교육에 대한 '로망'을 품었다. 여행한 도시마다 가장 먼저 찾았고 오래 머문 곳이 대학이었다.

세계적인 철학자와 과학자가 '발에 치이는' 독일 대학의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대학은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흔한 교문도 울타리도 없이 도시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대학의 도서관이 도시의 도서관이었고, 멘사로 불리는 대학의 식당마다 시민들로 가득했다.

독일의 대학입시와 학사 운영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독일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다. 그땐 유별나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제도였다. 등수를 매기지 않고, 대학 서열도 없으며, 고등학교 졸업 자격만 취득하면 어느 대학이나 진학할 수 있다는 게 당혹스러울 만큼 신기했다.

특히 아이들을 놀라게 한 건, 학교마다 내걸린 독일 교육의 목표였다. 독일에선 학생들이 교육을 통해 길러야 할 핵심 역량을 '저항하는 능력'과 '분노하는 능력', '교감하는 능력'이라고 명토 박고 있다. 독일의 학교에선 "'문제아'가 되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던 아이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당시 큰아이는 대안 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입버릇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 독일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곧장 영어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가 하면, 나중에 갚을 테니 독일 대학의 학비와 생활비를 대달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여행을 다녀온 뒤 그는 독일이라고 하면, 프라이부르크 대학 본관 외벽에 적혀있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글귀를 먼저 떠올렸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드레스덴 공대의 멘사에서 어울려 식사했던 대학생들의 학구적인 모습도 기억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이 에워싼 베벨 광장 지하의 빈 서가도 입에 올렸다. 이는 나치의 선전 장관 괴벨스의 선동에 책을 불태운 당시 대학생들의 반문명적 만행을 성찰하는 기념물이다.

'교육적 수능'은 애초 성립 불가능한 형용모순

그토록 바랐던 독일 유학은 이뤄지지 못했다. 대안 학교를 졸업한 그해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때문이다. 꼼짝없이 발이 묶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 갇혀 언제인지 모를 그날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장고 끝에 우선 우리나라 대학에 진학한 뒤 훗날을 도모하기로 했고, 그렇게 '반강제적인 재수'가 시작됐다.

지난 3년간 책만 읽고, 방과 후 밴드 활동과 축구에 미쳐 있던 그에게 대입 준비는 녹록지 않았다. 한 학년 전체라고 해봐야 40명뿐인데다 듣는 수업도 각각 달라 내신 등급을 산출할 수도 없어, 대입은 곧 수능 준비를 의미했다. 학교 교육과정이 수능과는 무관했던 까닭에, 말이 재수지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셈이었다.

그해 3월 생전 첫 모의평가를 치른 뒤 수능의 '필요충분조건'을 대번 깨달았다. 국어와 영어는 해볼 만하다고 했다. 탐구 과목으로 선택한 한국 지리와 세계 지리 두 과목은 별도의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도 성적이 좋았다. 10년간 외국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동선을 짠 게 큰 도움이 된 성싶다.

문제는 수학이었다. 나름 '수학적 사고력'을 총동원해 머리를 쥐어짰지만, '찍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예상했던 대로, 결과는 7등급. 알다시피, 수험생 중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태반인 현실에서 대강 6등급과 9등급 사이는 당일 컨디션에 따라 결정된다.

민망한 결과에 오기가 발동했다. 그때까지 평생 학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 선뜻 집 가까운 수학 학원에 직접 등록했다. 하루 중 학원에서 보내는 한두 시간을 제외하곤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수학 기출 문제를 푸는 것 말고는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재수하는 1년간 그는 '수학 문제 풀이 기계'로 살았다.

모의평가가 반복될수록 수학 성적은 수직 상승했고, 수능 때 급기야 1등급을 찍었다. 되레 만만해하던 국어 영역이 2등급으로 내려앉았다. 3월 모의평가 7등급이었던 아이가 11월 수능에서 1등급을 찍은 사례는 워낙 드물어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코로나로 독일 유학의 꿈이 좌절된 아이는 그렇게 계획에도 없던 명문대생이 됐다.

"수험생이 이게 과연 교육적인지, 또 이를 통해 미래 인재를 선발할 수 있는지 성찰하는 건 수능 준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에요. 제가 깨달은 '수능 대박'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투철한 경쟁의식'과 '반복적인 문제 풀이', 그리고 '무사유'입니다."

성격도 재능도 다 다를 수십만 수험생을 한날한시에 모아놓고 같은 시험 문제로 한 줄 세우는 데 대한 의문을 스스로 던지는 순간 수능은 필패라는 거다. 선다형 시험으로 수험생의 역량을 평가하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하느냐는 질문은 수능이라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한가한 소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교육적 수능'은 애초 성립 불가능한 형용모순이라고 단언했다.

대학 진학 후 더 강해진 독일 교육에 대한 로망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겉표지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겉표지
ⓒ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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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수능 점수를 높이려면 무조건 '맹목적'이어야 한다는 아이의 경험담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국의 모든 학교가 '반교육적'인 수능에 다 걸기하고 있다는 건, 우리 교육 자체가 '반교육적'임을 방증한다. '반교육적' 수능을 향해 십수 년의 생애를 바친 아이들이 대학 진학 후 '교육'을 성찰할 리 만무하다. 그래선지, 요즘엔 스스로 '지성인'을 자처하는 대학생도 드물다.

느닷없이 명문대생이 된 아이는 지금 휴학 중이다. 그는 지금 대학엔 희망도, 미래도 없다고 선선히 말한다. 자본 권력의 노예가 된 대학의 현실을 성찰하는 움직임도 없고, 민주주의와 불평등 해소를 부르짖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오로지 '메디컬'과 로스쿨로 갈아타기 위해 '반수'를 하고, 취업을 위한 자격증 준비에 여념이 없는 친구들의 분주함만 교정에 가득하다는 거다.

명문대생임을 부러워하는 주위의 시선이 아이는 부담스럽다고 했다. 철저히 파편화한 대학생들이 학적만 공유하고 있는 공간일 뿐, 사실상 우리 사회 대학의 존재 이유는 없다고 잘라 말해온 터다. 구조적 모순을 감추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공정'과 '능력주의'라는 허울만 남은 학벌 구조 속에서 명문대생은 '반교육'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라는 거다.

그는 모든 대학이 기능부전에 빠진 건, 한 줄 세우기식 수능에 목매단 우리 교육의 획일성과 맹목성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수험생들이 수능의 교육적 의의와 공정성, 실효성 등에 대해 본질적 의문을 던지고, 교사를 비롯한 기성세대가 토론에 응할 때라야 대학, 나아가 우리 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고 확언했다. 당장 선다형 수능을 폐지하는 게 첫 단추라고 덧붙였다.

아이는 대학 진학 후 독일 교육에 대한 '로망'이 더욱 강해졌다. 그는 한사코 우리가 독일 교육에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품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수능을 준비하며 직접 보고 겪은 우리 교육의 절망스러운 상황이 '남의 떡이 커 보이게' 만든 것이다.

휴학 중인 아이에게 일독을 권할 생각이다. 그도 아빠처럼 무릎을 치며 단숨에 읽어낼 것이다. 책을 읽고 난 뒤, 코로나로 좌절된 독일 유학의 꿈을 다시 꾸게 될지, 아니면 독일 교육을 '정면 교사' 삼아 대학생으로서 교육개혁에 힘을 보태게 될지 모르겠다. 물론, 개인적인 바람은 반교육적이고 야만적인 경쟁이 횡행하는 여기에 남아 함께 어깨 겯는 것이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 김누리 교수의 대한민국 교육혁명

김누리 (지은이), 해냄(2024)


태그:#경쟁교육은야만이다, #김누리중앙대교수, #독일교육, #능력주의, #교육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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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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