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사진 속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두 와인은 샤토 랭쉬 바쥬 2000과 2014다. 둘 다 2020년에 마셨던 와인인데 병을 집에 보관해 놓았다.
 
포도 작황이 좋은 해의 랭쉬 바쥬는 1등급 와인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 샤토 랭쉬 바쥬 2000과 2014 포도 작황이 좋은 해의 랭쉬 바쥬는 1등급 와인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 임승수

관련사진보기

 
샤토 랭쉬 바쥬는 프랑스 보르도 포이약 마을에서 생산된다. 보르도에서 1등급을 받은 최고의 다섯 와인, 소위 5대 샤토 중에서 무려 세 와인이 이 마을에서 생산된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라투르, 샤토 무통 로칠드의 고향이니, 근본 그 자체 아닌가.

그렇다면 포이약에서 샤토 랭쉬 바쥬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포도 작황이 좋은 해의 랭쉬 바쥬는 1등급 와인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내가 마셨던 2000 빈티지가 딱 그러했다. 작황이 좋은 해에 생산되어 20년을 숙성된 녀석의 느낌을, 당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바로 극락행. 하도 감탄사를 뿜어내어 아내한테 핀잔먹었다.'

하지만 같은 해에 영접한 2014 빈티지는 마시기에 너무 어려서 아쉬움이 있었다. 6년이나 된 와인이 어리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10살 어린이와 30세 성인을 비교하면 외양과 목소리에서 큰 차이가 난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코르크로 막힌 병 안에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맛과 향에 변화가 일어난다. 고급 보르도 와인일수록 그 변화의 폭은 극적으로 커서 샤토 랭쉬 바쥬 정도 되는 와인은 최소 10년은 기다려야 그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다만 오래 기다린다고 해서 마냥 좋아지는 건 아니다. 와인도 수명이 있어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노화 현상이 일어나 사망에 이른다. 아무리 좋은 와인이더라도 사십 년 오십 년을 버티기는 쉽지 않다. 대체로 고급 와인일수록 수명이 길고, 저렴한 와인일수록 수명이 짧다. 1만 원대의 저렴한 와인을 장롱에 넣어놓고 10년 있다 마시면 십중팔구 사망해서 볼품없는 미라가 되어 있을 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뜬금없이 샤토 랭쉬 바쥬 이야기냐고? 지난 3월 6일 오후 3시에 무려 샤토 랭쉬 바쥬의 소유주인 장샤를 카즈(Jean-Charles Cazes)와 와인을 시음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네 주제에 그런 천룡인과 함께 와인을 마시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와인 지식도 한미한 데다가 서푼짜리 글 팔아 근근이 연명하는 작가 나부랭이지만, 와인 에세이집도 내고 언론사에 꾸준히 글도 쓰다 보니 이렇게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 의외성이야말로 작가 직업의 매력이다.

시음회에서 맛본 샤토 오 바타이 베르소 2017와 2020

시음회는 에노테카 코리아에서 개최했는데 장샤를 카즈 가문이 생산하는 다양한 와인을 시음하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와인은 마치 코스 요리처럼 순차적으로 제공되었다. 시음 때마다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장샤를 카즈(Jean-Charles Cazes)가 샤토 랭쉬 바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샤토 랭쉬 바쥬의 소유주 장샤를 카즈 장샤를 카즈(Jean-Charles Cazes)가 샤토 랭쉬 바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임승수

관련사진보기

 
첫 시음에서는 샤토 오 바타이 베르소 2017와 2020이 동시에 등판했다. 장샤를 카즈는 시음회 참가자들에게 3년의 숙성 차이를 염두에 두고 비교 시음해 보라고 조언했다. 둘 다 블렌딩 비율이 같아서 카베르네 소비뇽 60%, 메를로 40%를 섞어 만들었으며 12개월 동안 오크통에서 숙성한 후 병에 넣었다. 와인서쳐 앱으로 해외 평균 가격을 확인하니 약 4만 원(세금 제외)이다.

일단 향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2017은 봄바람에 꽃가루가 휘날리듯 잔 속이 향기로 가득 차서 코를 가까이 대기만 해도 대번에 향이 느껴졌다. 하지만 2020은 마치 봉오리가 닫힌 꽃과 같아서 코를 잔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어야 그나마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평론가 점수를 찾아보니 2017보다 2020의 점수가 대체로 더 높다. 잠재력으로 본다면 2020이 더욱 뛰어난 와인이라는 의미다. 결국 괜찮은 보르도 와인을 충분히 숙성하지 않은 채 마시면 향에서부터 손해를 본다.

입에서도 같은 결론이 나왔다. 2020은 확실히 과실 집중도가 좋고 잠재력이 느껴지긴 하지만 타닌이 강해 다소 떫다. 맛이 부드러워지기 위해서는 숙성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반면에 2017은 너무나도 매끄럽고 편해서 술술 넘어간다.

잠재력을 고려한다면 잘 숙성된 2020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겠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더 선호하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2017을 선택할 것이다. 해외 평균 가격 4만 원대의 보르도 와인도 빈티지(포도 수확 연도)로부터 7년 정도는 지나야 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얘기다.

베토벤이 38세가 되어서야 교향곡 5번 '운명'을 세상에 내보였는데, 만약 30살에 사망했다면 후세대 사람들은 이 명작을 감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숙성 잠재력이 높은 보르도 와인을 일찍 열어 마시는 건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을 쓰기 전에 생을 마감하는 것과 같다. 뛰어난 보르도 와인의 절정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두 번째 시음은 샤토 오 바타이 2017과 2018이었다. 장샤를 카즈는 참가자들에게 떼루아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시음하라고 조언했다. 떼루아는 천지인(天地人), 그러니까 기후(天), 땅(地), 사람(人)처럼 와인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치는 제반 요소를 일컫는 말이다.

샤토 오 바타이 2017과 2018에서는 숙성의 차이보다는 떼루아의 차이가 훨씬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힌트를 준 것이다. 땅도 같고, 만든 사람도 같으니, 아무래도 기후의 차이가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와인서쳐 앱으로 샤토 오 바타이의 해외 평균 가격을 확인하니 약 9만 1천 원(세금 제외)이다.

빈티지별로 블렌딩 비율이 달라서 2017은 카베르네 소비뇽 66%에 메를로 34%이며, 2018은 카베르네 소비뇽 59%에 메를로 41%이다. 오크통에서 16개월 동안 숙성한 후 병에 넣었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2018 빈티지를 더 높게 평가했는데, 두 와인의 향과 맛을 비교해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2017에 비해 2018의 향이 더 강하고 화사하며 묵직하다. 2017년보다 2018년 날씨가 더 좋았구나. 그래도 1년 선배라고 2017이 마시기에 좀 더 부드럽고 편한 느낌이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2018을 잡을 정도로 기량 차이가 컸다. 몇 년 더 지나 충분히 숙성되면 얼마나 맛있어지려나. 품질의 차이는 가격에도 반영되어 2017의 해외 평균가가 9만 3천 원(세금 제외)인 반면 2018의 해외 평균가는 10만 8천 원(세금 제외)이다.

그야말로 헤비급 와인
 
샤토 랭쉬 바쥬 2014.
 샤토 랭쉬 바쥬 2014.
ⓒ 임승수

관련사진보기


드디어 대미를 장식하는 샤토 랭쉬 바쥬 2014 등장이다. 4년 전에 만났을 때는 서로 서먹서먹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궁금하구나. 와인서쳐 앱에 나오는 해외 평균가는 무려 19만 6천 원(세금 제외)! 그야말로 헤비급이다. 잔을 코에 가져가니 향기의 집중도와 궐리티에서 앞선 와인들과 격이 다르다. 코에서 한껏 기대감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네 기대치가 왜 이렇게 낮냐며 비웃는 듯 입에서 잭팟이 터진다. 와우!

마시자마자 감지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입에서의 질감이다. 최고급 순면 이불에 얼굴을 파묻을 때나 느낄 법한 보드라움이 구강 내부를 스친다. 앞서 마신 멀쩡한 와인들이 상대를 잘못 만나 졸지에 깔깔한 모시옷으로 전락한다. 그 매끄러움과 보드라움에 이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농익은 과실 향과 은은하면서도 견고한 타닌 또한 일품이다.

이게 2020년에 마셨던 녀석과 같은 와인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4년 만에 어마어마하게 진화했구나. 그때 서먹서먹했었던 건 전적으로 인내심이 없었던 내 탓이다. 일찍 마시면 안 되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견물생심이라고 근사한 보르도 와인이 눈앞에 얼쩡대니 손이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이제 어린 보르도 와인은 셀러 저 구석에 처박아 놓고 몇 년간 거들떠보지도 않으련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

태그:#샤토랭쉬바쥬, #장샤를카즈, #임승수, #포이약, #숙성와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