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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눈이 섞여 내리던 지난 2월 21일, 인쇄업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서울시의 세운재정비촉진계획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청계천, 을지로, 충무로로 더 익숙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는 오래된 건물이 밀집된 지역이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그간 방치되어 왔음을, 재정비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인쇄업자와 디자이너가 왜 함께 거리로 나선 것일까? 

낙후, 노후화된 지역에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말은 언뜻 논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지역은 그저 오래된 곳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을 한 번이라도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물론 건물 연식이 오래되었고 시설이 편리하다고 할 수 없다. 재개발 이야기가 워낙 오래전부터 오간 터라 건물주들이 관리에 손을 놓은 곳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발길이 끊어졌다거나, 이용 인구가 고령화되어 '재생'이나 '개발'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지역은 사람들이 청소년기부터 관계를 맺고 오랫동안 이용하는 일터이자 삶터로 서울의 그 어느 지역보다 활성화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인쇄 산업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행진 중인 상공인들 (2024.2.21.)
 인쇄 산업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행진 중인 상공인들 (2024.2.21.)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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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도 대형 쇼핑몰보다 힙하고 재밌는 곳

이를 뒷받침하는 "을지로 청계천 시민 이용자 설문조사"가 지난해 6월 27일부터 7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설문엔 400명의 시민이 서울시의 세운재정비촉진계획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참여해 주었다. 참여자의 대부분인 74.6%가 1986년~2000년대 생으로 젊은 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 가장먼저 눈에 띈다. 이들은 35%가 지난 5~10년간, 또 29.8%가 지난 1~5년간 세운재정비촉진지구를 이용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임을 감안하면 짧지 않은 시간 지속적으로 이 지역을 이용했다 볼 수 있다. 

이들은 생산과 소비 둘 모두를 위해 이 곳을 방문한다. 월 1~2회 정도는 사적 모임을 하기 위해 이 지역을 찾는데, 그 이유가 중요하다. 바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섞여 있기 때문'(68.3%)이다. 젊은 세대들에게 옛모습 그대로 유지되어 온 이 지역의 모습이 큰 매력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노포 감성'이라며 이 지역의 모습을 재현한 강남의 모 술집 같은 곳이 이를 방증한다.

이 지역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인쇄물 제작을 위해서(59.3%)다. 제작처가 몰려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근처에서 원하는 제품이나 원자재를 찾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작-유통망이 제공하는 편의성을 생각하면 인쇄물을 제작하려는 이들에게 이곳은 이미 놀거리도 먹거리도 쇼핑할 거리도 풍부한 대형 쇼핑몰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노후화되었다고 '아파트를 지어 개발하겠다'는 건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의 주요한 이유를 모두 파괴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서울시의 개발론이 무식한 탁상공론인 이유다. 

모두의 일상 속 흥미로운 인쇄물을 책임지는 곳

더욱이 이곳의 인쇄 집적지를 이용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전국에 걸쳐 분포한다. 인쇄공학박사 조가람의 연구에 따르면 서울시 중구는 서울시 전체 인쇄소의 60.2%가 집적되어 있는 곳으로 서울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포함 전국의 인쇄 수요를 소화해 내고 있다.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실장으로 근무하는 김소미씨는 실제 청계천-을지로 지역을 방문하는 횟수는 적지만 이곳에 대부분의 거래처를 두고 일하고 있다. 그는 "직접 방문하지 않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을지로의 거래처와 제작 관련 상담을 하고 원자재 샘플을 수급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박수연씨 역시 청계천-을지로 지역의 인쇄업체와 거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전의 지역 인쇄소가 소화할 수 있는 인쇄 및 후가공의 범위가 한정적이기에 의도한 디자인을 재현하기엔 무리가 따르고, 최신 원자재 샘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청계천-을지로 방문은 필수"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거의 두 달에 한 번꼴로 동대문부터 충무로까지 이어진 제작업체와 원자재 시장을 둘러본다는 그는 또 "소규모라도 실험적이고 복잡한 구조의 디자인물 제작에 기꺼이 함께 고민하고 방법을 찾는 업체와 일하려면 결국 청계천-을지로 지역으로 가야 한다" 덧붙였다.

이렇듯 디자이너에게 있어 청계천-을지로 지역은 머릿속의 실험적인 아이디어를 물리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핵심 파트너와 같다. 그렇기에 청계천-을지로 지역의 제작-유통 인프라가 사라지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많은 수의 응답자가 "막막함", "대체불가", "불편", "두려움", "답답"과 같은 키워드를 언급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산업 생태계의 파괴', '(제작) 비용 상승', '노하우의 소멸', '업무적 손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중구인쇄인 생존권 수호 위한 대토론회>에서 한국인쇄학회 조가람 박사가 발료한 '중구 인쇄 집적지의 특징'
 <중구인쇄인 생존권 수호 위한 대토론회>에서 한국인쇄학회 조가람 박사가 발료한 '중구 인쇄 집적지의 특징'
ⓒ 조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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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지로 지역의 파괴는 단순히 한 지역의 재개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을 포함, 혁신성이 주요 경쟁력인 이곳과 연결된 수많은 산업의 후퇴를 의미한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앞서 언급한 두 디자이너의 사례만 보아도 그렇다.

그들은 모두 미술관, 박물관과 같은 국내 주요 정부 기관의 용역을 수행하는 조직에서 일한다. 이런 기관들은 복잡한 사양의 인쇄물을 소량으로 제작하여 고급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접근성과 기록의 측면을 고려하면 무작정 디지털화하기도 어려운 분야다. 이들에게서 청계천-을지로와 같은 주요한 제조-유통 인프라를 빼앗는 것은 서울시가 정부 기관으로서 결국 제 발등을 찍는 것은 아닌가? 공공 문화를 향유하는 국민 모두에게 손해인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창작자에게는 양육과 돌봄의 공간이기도

주목해야 하는 키워드는 하나 더 있다. 바로 '노하우의 소멸'이다. 이 지역은 디자이너에게 단순한 협업 파트너 그 이상을 의미한다. "고등학생 때 을지로 인쇄소에 처음 갔던 기억이 납니다. 충무로까지 이어진 인쇄 골목에서 공부도 하고 견학도 했던 소중한 곳입니다." 설문에 참여한 한 응답자가 남긴 응답이다. 이는 한 응답자의 특별한 사연이 아니다. 많은 수의 디자이너가 청소년기 다양한 이유로 인쇄 제작을 접하며 자연스럽게 디자이너의 꿈을 키운다. 자신의 습작을 소규모 출판하여 페어에 참여한다거나, 좋아하는 아이돌의 굿즈를 직접 만들어 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때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곳은 학원이나 학교가 아니다. 바로 소규모 인쇄에 특화된 청계천-을지로 지역의 장인들이다. 청계천-을지로 지역은 한국 디자이너의 양육도 담당하는 돌봄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 관련 일을 시작하거나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도 모르겠으면 청계천으로 가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분들이 흩어지게 되면 기술자분들의 일자리가 존속 불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새로운 작가와 창업자들이 오랜 경험과 역사를 가지신 기술자 선생님들과 만날 수 있는 장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다른 응답자의 호소다. 

디자이너는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권장되는 직업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청계천-을지로 지역의 존재에 많은 부분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봤자 빠르게 실험해 볼 수 없다면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 혁신은 컴퓨터 앞이 아니라 이런 탄탄한 제조-유통망을 통해 구현된다. 
 
청계천 을지로 산업 유통 생태계 (https://social-capital.cheongyecheon.com)
 청계천 을지로 산업 유통 생태계 (https://social-capital.cheongyecheon.com)
ⓒ 청계천을지로보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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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 서울시의 역할은 청계천-을지로가 모두의 이득으로 돌아오는 이 공공성을 더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보장하는 일일 테다. 서울시의 개발 계획을 반대하는 이들이 요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은 완벽하고 개발이 필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건 서울시가 이 지역이 그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두루 살피고 보조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시가 그저 제구실하길 바란다는 당연한 요구를 하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서야만 했던 것이다. 영국의 도시계획 석학 피터 홀은 도시계획은 공동체와 공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요구에 지금이라도 진지하게 응답해야 할 것이다.
 
연재 순서(안)
1화 멈추지 않는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2화 디자이너들이 경험한 청계천-을지로 산업생태계의 가치 
3화 청계천-을지로 재개발의 문제들
4화 산업유산 아키비스트가 살펴본 도심 산업 공간
5화 재개발로 쫓겨난 상인들의 이주 경로
6화 도시역사와 근대문화유산을 파괴하는 도시기본계획
7화 '단군 이래 최대 개발 사기' 용산정비창 개발 프로젝트
8화 재개발로 사라지는 문화유산과 역사적 기억
9화 시민들이 바라는 청계천-을지로의 미래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신인아씨는 오늘의풍경 디자이너입니다.


태그:#청계천을지로, #도심산업생태계, #세운재정비촉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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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는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수표도시환경정비사업 등의 이름으로 재개발 될 위기에 처한 청계천-을지로를 지키고자 2018년 12월 결성된 예술가, 디자이너, 메이커, 연구자, 시민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도시재생이란 이름의 재개발로부터 이 곳의 가치를 기록하고 알리고 지킬 수 있도록 상인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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