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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냐."

당신의 작은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훝어본다. 살짝 놀란 듯 어색한 표정이다. 분명 저번달까지도 나를 알아보셨는데. "저 손녀딸 혜림이에요! 송혜림!" 할머니는 그제야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으응, 혜림이. 혜림이구나." 입가에 봄 꽃같은 맑은 미소가 걸린다. 어린 나를 반기시던 그때 웃음 그대로.

할머니가 대전 소재 요양센터에 들어가신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 간다. 대전에 사시는 부모님은 주말마다, 서울에 사는 나는 한 달에 한 번 그 곳을 찾는다. 할머니는 여든 넷이라는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또래 어르신들보다 총명하고 씩씩하신 편이셨다. 식사도 스스로 차려드셨고, 요양보호사 선생님이나 다른 할머니들 하고도 오랜 수다를 떨었다.
 
사오년 전에 촬영했던 할머니의 손. 지금은 훨씬 쪼글쪼글해졌다.
▲ 할머니 손 사오년 전에 촬영했던 할머니의 손. 지금은 훨씬 쪼글쪼글해졌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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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몇 달 사이 할머니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주변 이들의 이름을 꽤 자주 잊어버렸고, 발음은 어눌해져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당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턴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해졌다. 휠체어 없인 병실 내 화장실조차 이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덩치 큰 성인 두 명이 낑낑대며 할머니를 업어야지만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고향 집에 가고 싶다"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이번 설 명절에 우리와 함께 고향길을 떠나신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고향은 전라남도 순천. 설 연휴 꽉 막힐 교통을 생각하면 왕복 10시간은 걸릴 게 뻔했다. 성치 않는 몸으론 모험과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기에 당신의 결정을 묵묵히 따르기로 했다. 할머니는 지금보다 정신이 멀쩡했을 때 자주 고향 얘기를 했다. 대청마루에 말려 놓은 고추를 걷으러 고향에 가야 한다고 떼를 쓰시는 바람에 엄마랑 종종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오랜 그리움에서 빚어진 투정이란 건 엄마도 나도 알았다. 할머니의 고향집은 열 셋에 시집을 가 한평생 할아버지 일을 도우며 네 자녀를 키워낸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10여년 전 먼저 하늘로 떠나신 후 지금은 오랫동안 빈집으로 남아있다.

모두의 예상대로, 고속도로는 꽉 막혀 정체되는 시간이 많았다. 좁은 차 안에서 할머니는 선잠을 자고 깨는 일을 반복했다. 두터운 코트 밖으로 내 놓은 쪼글쪼글한 두 손은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건넨 약과를 오물오물 씹거나, 푸른 풍경이 스쳐 지나 가는 창 밖 너머를 구경했다.

조수석에 앉은 엄마는 잠도 안 자고 종종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상태를 체크했다. 어머니, 목도리 답답하니 좀 푸르셔요. 물 한 잔 드릴까요. 자리 옆 팔걸이에 팔 기대셔요. 그러면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엄마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가끔은 두 분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지간이 아니라, 친딸보다 더 가까운 모녀 사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다섯 시간을 달린 후에야 사람들로 번잡했던 낙안읍성을 지나 할머니가 살았던 마을 초입에 다다랐다. 당신이 살던 동네는 마트가 있는 시내하고도 차로 20분 떨어진 외딴 시골이다.

동네에 몇 안 되는 아담한 처마집들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올목졸목 모여있다. 지붕은 집집마다 붉은색, 초록색, 파란색 등 알록달록하게 물들여져 있다.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마을 어귀에 놓인 작은 정자는 느티나무 아래 버젓히 서 있다. 이날은 머리가 하얗게 센 어르신 두 분이서 소소하지만 치열한 화투판을 벌이고 있었다.
 
할머니의 집 초입. 초록 대문에 초록 지붕이 매력적인 곳이다.
▲ 할머니 집 초입 할머니의 집 초입. 초록 대문에 초록 지붕이 매력적인 곳이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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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땐 골목마다 동네 어르신들로 복작복작했다. 날 좋을 땐 할아버지 내외와 수다를 떨러 편히 집을 들락거렸고, 가끔 나를 발견하면 달달한 요깃거리를 쥐여 주곤 했다.

소나 사슴을 키우는 집도 많아 달 뜨는 밤엔 동물 울음소리가 우우 울려퍼지기도 했다. 설에는 집집마다 대화 소리와 고소한 부침개 냄새로 가득했다. 설 당일 저녁에는 어르신들이 갈비나 떡 따위의 명절 음식을 작은 접시에 나눠 문지방이 닳도록 이웃집을 돌기도 했다.

"여기는 순찬 아버지 댁. 제작년에 장례 치렀다고 했지요."
"으응."
"여긴 금자 할머니 댁. 이맘때 돌아가시고 집을 허물어서 터만 남았네."


할머니는 아빠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머니와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어르신이자 친구분들이었다. 이곳 동네는 어르신들이 하나 둘 하늘로 떠나며 공허가 찾아왔다. 그 흔했던 경운기의 탈탈 거리던 소리조차 쉬이 들을 수 없었다. 집집 대문 마다 길렀던 소박한 꽃들도, 왕왕 짖던 동네 개들도, 아궁이에 밥 짓는 냄새도. 모두 빛바랜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고향집에 이르는 큰 길로 들어서자 할머니는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기도를 했다. 그간 집을 잘 지켜준 터주신을 위한 인사라고 했다. 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마당의 작은 텃밭과 고모가 키우는 닭들, 그리고 초록색 지붕의 처마집이 눈에 들어왔다. 친척들이 자주 들러 깨끗히 청소한 덕에 집은 예전 모습 그대로 번듯히 서 있었다. 창호 문을 열면 늘 풍겨 오곤 했던 퀴퀴한 냄새도 변함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지는 못하셨지만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있는 할머니 집
▲ 할머니 댁 오랜 세월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있는 할머니 집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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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해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에는 발을 디디지 못했다. 과일을 깎아 손주들에게 나눠주곤 했던 낡은 대청 마루 앞에서, 당신은 담담해보였지만 이윽고 눈물을 훔쳤다.

내가 기억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공간마다 조각조각 나뉘어 있다. 새벽같이 부엌에 나가 자식 내외를 위한 시래기국을 끓이던,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부채를 팔락이던, 올드한 귀금속이 가득한 화장대 앞에서 곱게 분을 바르던 모습들을 말이다.

할머니가 고향 집을 마음껏 눈에 담는 동안, 엄마와 아빠는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할머니를 아는 주민들에게 할머니의 고향 방문 소식을 알렸다. 이윽고 굽은 허리로 한걸음에 할머니 집을 찾은 할머니들은 우리 할머니의 손을 덥썩 잡고 눈가를 붉혔다.

여지껏 살아서 얼굴을 봤구먼. 왜 이리 늙었어. 할머니들은 웃음과 눈물을 반복하며 연신 서로를 쓰다듬었다. 소녀 시절 시골로 시집을 와 궃은 농사일을 도맡으며 서로를 의지했을 그들의 우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할머니와 친하게 지냈다던 동네 할머니. 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 할머니 손을 잡는 동네 동생 할머니 할머니와 친하게 지냈다던 동네 할머니. 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을 펑펑 흘리셨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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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봐."

할머니는 짧은 만남 후 긴 인사를 남겼다. 당신의 말에 가슴이 아려와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이 고향길을 또 떠나올 수 있을까. 또 보자는 말이 단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는 걸, 너무나 간절하고 애틋한 소원이라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분명 신이 있다면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을 이뤄주시지 않을까.

할머니는 고향 인근에 사는 다른 자녀들과도 오랜만의 인사를 나눴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큰 딸과 막내 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네가 누구냐?"며 눈을 끔뻑였다. "엄마, 아무리 치매여도 딸을 기억못하면 어째요." 고모들은 장난스레 묻다가도 결국 눈가를 훔쳤다.
 
할머니는 대전에 올라가는 길 내내 큰 고모가 준 용돈 봉투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 큰 딸이 준 용돈 봉투를 바라보는 할머니 할머니는 대전에 올라가는 길 내내 큰 고모가 준 용돈 봉투에 눈길을 떼지 못했다.
ⓒ 송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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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고모는 할머니가 다시 대전으로 떠나기 전 용돈을 쥐여 드리며 "사랑해요, 엄마. 내가 많이 사랑해"라며 눈물을 터트렸다.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끝까지 큰 고모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대전에 올라가는 그 긴 시간 동안, 할머니는 큰고모가 쥐여 준 용돈 봉투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리고 하도 쓰다듬어 주름이 잔뜩 진 봉투를 요양센터에 도착하고 나서야 품에 소중히 넣었다. 큰 딸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녀과 함께했던 그 길고 소중한 세월만큼은 가슴 깊이 남았으리라.

강인한 여성으로 기억될 할머니

5년 전인가. 내가 대학생 때 할머니는 딱 한 번 당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여학교 진학을 꿈꿨지만 어려운 집안 탓에 시골로 팔려가듯 시집간 얘기, 밤새 시어머니 품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던 얘기, 지금의 나의 아버지인 막내 아들을 품에 안고 기쁨에 겨워 울던 얘기 따위를. 그래서 할머니는 여태껏 내게 할머니로 기억되지 않았다. 열 셋의 풋풋하고 맑았던 소녀에서 네 자녀를 건강하고 씩씩하게 키워 낸 강인한 여성으로 내 안에 살아있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남편과 자식만을 위한 삶을 살았던 할머니. 모두를 건장하게 키워낸 지금도 새벽 아침이면 성경책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며 자식들을 위한 기도를 읊었던 당신.

삶의 마지막 시계가 야속할 정도로 빨리 흘러가도, 좀 더 오래 저희 곁에 남아줘요. 더 많이 서로의 얼굴을 쓰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줘요. 올해 가을에는 고향집에 한 번 더 놀러가요. 늘상 그랬듯 할머니 집 앞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황금빛 벼들을 함께 보러 가요. 꼭, 그렇게 해요 할머니.

덧붙이는 글 | 다음 브런치 제 개인 계정에도 기사 송고 후 함께 올라갈 예정입니다.


태그:#할머니,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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