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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과 더불어 부모님의 생신은 해마다 특별히 신경 써야 하는 가장 큰 가족 행사이다. 그나마 시부모님 두 분의 생신이 일주일 차이라서 한꺼번에 챙겨드리고 있으니 다른 집 며느리들에 비해서는 수고가 절반이지만, 그래도 생신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분주해진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시부모님 생신은 남편이 알아서 준비하고 있다. 그 얼마 전에 부부싸움을 하던 중, 남편이 홧김에 '이제부터 각자의 부모님은 각자가 챙기면서 살자'고 얘기한 후로 남편은 자신의 부모님을 스스로 챙기려고 하는 것 같다.

사실 말은 각자 알아서 챙기자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며느리에게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가 어디 사위에게 기대하는 그것에 비하겠는가. 그 이후로도 내가 며느리로서 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별로 줄어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시부모님 생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도 별 대답이 없던 남편이 생신을 며칠 앞두고 시댁 근처에 펜션을 예약했다고 했다. 자신은 이틀 먼저 시골집으로 내려갈 테니 나에게는 당일에 기차를 타고 오라고 했다. 어떤 펜션을 예약했는지, 가서는 무엇을 할 것인지 궁금했지만 미리 묻지 않고 이번에는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기차역에 마중 나와 있는 남편을 만나 간단히 장을 본 후에 펜션으로 갔다. 펜션은 시댁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황토로 지은 흙집이었다. 집의 모양이 독특해서 TV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곳이라며 남편은 으스대는데 정작 어머님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 취향 아니라 남편 취향의 펜션
 
시어머니는 흙집 펜션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시어머니는 흙집 펜션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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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드는데 뭐하러 이런 데를 빌렸냐?"

항상 아들이 돈 쓰는 것을 미안해하시는 부모님이라서 의례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라고 넘기기에는 어머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다. 28년 차 며느리의 눈치로 남편이 나간 뒤 어머니께 슬쩍 여쭤보았다.

"어머니, 여기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내가 평생을 시골집에 처박혀 산 것도 지긋지긋한데, 또 이런 촌집에 데리고 온다냐..."

  
원래 속내를 잘 숨기지 못하시는 어머님은 아들이 신경 써서 준비한 것이라 차마 아들 앞에서는 내색하시지 못하다가 결국 며느리에게 불만을 드러내셨다. 나 역시도 이번에는 시골집이 아니라서 좀 편하게 잘 수 있겠거니 기대했다가 시댁보다 더 불편한 시골집을 맞닥뜨리고는 적잖이 실망을 하던 참이었다. 

신이 나서 자기 집을 소개하듯 펜션 구석구석을 다니며 자랑을 늘어놓는 남편에게 어머니의 말씀을 전하자 남편은 당황스러워했다. 자기는 집에서 가깝고 시골집과도 비슷해서 부모님이 더 친밀하고 편안하게 느끼실 거라 생각해서 골랐단다. 

평소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나는 자연인이다'인 데다 TV에 시골살이가 나오면 자신의 고향과 부모님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어들고는 했으니, 남편은 부모님의 취향이 아니라 딱 자신의 취향대로 펜션을 골랐던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다른 가족들은 모두 펜션을 마음에 들어 했다. 다들 도시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이색적인 흙집에서의 하룻밤이 색다른 경험이 될 거라 기대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은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부모님도 자식들을 한 명씩 돌아보시며 흐뭇해하셨다. 

펜션에 대한 어머님의 소감을 전해 들은 시누이가 "동네 사람들에게 자식들 덕분에 근사한 곳에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거리가 못돼서 속상하신 거지"라고 말해 다들 한바탕 웃었다. 

나와 상의하지 않고 혼자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쳤던 걸 후회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남편을 바라봤다. 하지만, 남편은 그보다는 처음으로 자신이 주관하여 부모님의 생신을 챙겨드렸다는 사실에 더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우스갯소리로 '효도는 셀프(self)'라고 한다. 각자의 부모님은 각자 챙기며 살자고 했던 남편의 말이, 사실 그동안에는 내가 며느리로서 부족했다고 질책하는 것으로 들려 서운했었다. 그런데 이번 부모님의 생신을 보내며 셀프로 하는 효도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번 시부모님 생신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그동안은 생일상을 어떻게 차려야 할지 고민하고 뒷정리를 미리부터 걱정하느라 부모님의 생신이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알아서 준비해 주니 나는 즐기기만 하면 되어서 부모님께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우러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생신을 혼자서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신경을 많이 썼지만, 부모님의 취향을 잘 몰라서 실수를 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부모님과 함께 보낸 이틀 동안은 어른들 고집에 짜증이 나다가도, 나이가 들어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져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끝에는 나에게 '부모님을 항상 잘 챙겨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동안 남편에게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을 정작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이번에 처음으로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효도는 셀프'가 답인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 중복 게재될 수 있습니다.


태그:#효도, #부모님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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