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한 소년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우한 소년. 태어난 해는 1941년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아이를 떠났다. 해방이 되어서야 소년은 아버지를 만났다. 투옥과 수배를 반복하던 아버지였는데, 미 군정청에게 또다시 쫒기는 몸이 되었다. 해방은 사이비 해방이었다. 1946년 가을, 아버지는 북으로 피신했다. 버려진 소년,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고아가 되었다.
 
#2. 한 스님이 있었다.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혁명가였다. 무슨 연유에서 승복을 입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해방 후 창건된 조선공산당의 지하운동가였다. 소년의 아버지가 북으로 피신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핏줄을 이 스님에게 맡겼다. 버려진 소년의 후견인, 스님은 소년을 구례 화엄사에 맡기고 사라졌다. 한산 스님이다.
 
#3. 한 혁명가가 있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으로 투옥되었다. 1928년 동맹 휴학을 주도하여 징역을 살았다. 1933년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를 이끌었다. 공장 파업과 동맹 휴학을 지도하였다. 또다시 징역을 살았다. 1939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또 투옥되었다.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1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해방은 가짜 해방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자랑하는 미 군정청은 정치활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묵한 사람, 온화한 혁명가였지만 쫒기는 몸이 되어 북으로 피신했다. 북에서도 편하지 못했다. 굴욕의 삶을 사느니 싸우다 죽겠노라 남으로 내려 왔다. 여순 항쟁의 패잔병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체 게바라, 역사는 그의 이름을 이현상이라고 전한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왼쪽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왼쪽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 국가기록원

관련사진보기

  
아저씨와 빨치산 소년
  
  
소년이 이현상과 조우한 건 1951년이었다. 소년은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이현상을 따라다녔다. 빗점골 동굴에서 함께 잠을 잤고, 함께 밥을 먹었다. 이현상의 손을 잡고 지리산 골짝을 뛰어다녔다. 11세에 산사람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소년이 박헌영의 아들인 줄 몰랐다.
 
소년은 빨치산의 임무를 민첩하게 수행했다. 보급과, 척후, 연락의 역할을 수행했다. 된장이 떨어지면 마을에 내려가 된장을 얻어왔다. 토벌대가 오면 소년은 사라졌다.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냈다. 지리산에서 회문산까지 걸었다. 전북도당에게 문서를 전했다.
 
산사람에게는 금기가 있었다. 밥을 지을 땐 연기를 내선 안 된다. 능선으로 다니면 안 된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산사람은 각오를 했다. 굶어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총에 맞아 죽을 각오 말이다. 산사람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살았다.
 
영화 <남부군> 포스터
 영화 <남부군> 포스터
ⓒ 남 프로덕션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빨치산은 외로웠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지만 빨치산 남부군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이현상에게는 산중의 처가 있었는데 여인더러 먼저 하산하도록 하였다. 이후 이현상이 빗점골을 빠져 돌아가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그의 시신에는 한 편의 시가 들어 있었다.
 
한순간도 조국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네
가슴엔 굳은 각오 뜨거운 피 흐르네
 
스님은 소년에게 술을 사오라고 하였다. 이 날만은 취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스님은 나지막이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스님은 소년에게 이 노래의 주인공이 소년의 아버지라고 말해주었다.
 
스님은 이어 '황성옛터'를 불렀다.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 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옛터>는 떠도는 지하운동가의 외로움을 달래는 노래였다.
 
사라진 스님

1956년 7월 19일, 소년의 아버지가 북에서 처형되었다. 스님은 처음으로 소년에게 출생의 비사를 들려주었다. 어머니 정순년은 혁명가 박헌영의 지하운동을 돕는 여인이었다. 1941년 여인은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의 이름이 박병삼이다.
 
1963년, 한산 스님은 마침내 병삼의 어머니를 찾아냈다. 어머니를 처음 만난 병삼은 도리어 괴로웠다. "나는 왜 호적도 없이 사는가? 나는 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가? 나는 왜 산과 절을 전전하며 살아야 하는가?"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스님과 함께 울릉도에 갔다. 스님이 병삼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민족의 독립과 평등 세상을 위해 헌신한 혁명가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보지 말라. 역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증오심을 버려야 한다."
 
스님이 자취를 감추었다. 스물일곱 살까지 병삼을 도와주었던 보호자 한산 스님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홍도에서 스님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하여 달려갔으나 홍도에서 스님을 찾을 길이 없었다.
 
스님이 된 빨치산 소년

1973년, 박병삼은 흥왕사의 주지가 되었다. 법명은 원경 스님. 처음으로 삶의 평안을 찾았다. 1977년부터 재야인사를 만나기 시작했다. 김지하, 황석영, 김성동 등 흥왕사는 쫒기는 학생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어느 날, 박갑동이라는 분이 원경 스님을 찾아왔다. 박갑동은 젊은 시절 박헌영을 흠모한 측근이었는데, 박헌영의 비사를 잘 아는 분이었다. 1973년 <중앙일보>가 박헌영의 일대기를 연재하여 장안에 파문을 일으켰다. <중앙일보>가 박헌영의 삶을 공개하다니 무슨 영문이었을까? 박갑동은 자초지종을 밝혔다.
 
박정희가 나를 보자는 거요. 청와대에 들어가 만났습니다. <중앙일보>의 이병철 회장을 부르더니 박헌영 선생에 대한 글을 <중앙일보>에 연재해달라는 겁니다. 놀랐습니다. 박정희는 젊은 시절, 박헌영 선생의 <8월 테제>를 감동 깊게 읽었대요. 분명 '박헌영 선생'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손호철 교수가 2년의 땀을 흘려 원경 스님의 일대기를 집필하였다. 책의 이름은 <한 스님>이다. 한이 깊은 스님. 스님의 한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손호철 교수가 2년의 땀을 흘려 원경 스님의 일대기를 집필하였다. 책의 이름은 <한 스님>이다. 한이 깊은 스님. 스님의 한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 이매진

관련사진보기

 
원경 스님을 만나 가슴 속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21년 11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지리산에서 굶고 살았기 때문에 음식을 보면 남길 수가 없어요. 산중에서 밤이 되면 사무치도록 사람이 그리웠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을 지복(至福)으로 여깁니다." 석사 위에 박사가 있고, 박사 위에 밥사가 있다며 스님은 우스개 이야기도 하였다. 그날도 스님이 밥을 샀다.
 
며칠 후 난데없는 부고가 왔다. 2021년 12월 6일 원경 스님, 열반하다.

한 스님 - 박헌영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손호철 (지은이), 이매진(2023)


태그:#박헌영, #이현상, #박병삼, #한산스님, #원경스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