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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에 나서며 준비한 담화문을 꺼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에 나서며 준비한 담화문을 꺼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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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상식, '원칙과 상식' 현 대통령과 야당 일부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권에서 특정 담론이 나온다는 것은 이것이 시대적 문제로 공감을 받을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현 대통령은 공정과 상식을 외치며 당선됐으니 이것이 국민이 체감한 상식처럼 공감받았다는 뜻이다. 전 정부에서 벌어진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를 비롯해 사람들은 공정에 대한 감각에 더욱 신경 쓰게 되었다. 계급이 없는 사회가 현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 전제이니 모두가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저 단어 조합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원칙이다. 원칙이야말로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상식이고,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기본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그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 모두에게 공정한 원칙이 동일한 잣대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몇 가지 원칙을 살펴보자.

무죄 추정의 원칙

무죄 추정의 원칙은 형사소송 절차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원칙이다. 죄를 확정받기 전까지 피의자는 무죄로 추정해야 하고, 유죄에 대한 입증은 검사가 해야 한다. 이 원칙은 우리 사회가 더는 봉건 질서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스스로 정당성을 내세울 수 없었던 봉건국가의 왕들은 고문으로 수사하고, 범죄자를 처형하여 광장에 범죄자의 목을 달아 놓아 자신의 권위를 증명했다. 악을 처벌하는 선의 이미지, 또 사람의 신체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현대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왕과 달리 지금의 국가 폭력은 국민이 사회 질서라는 공익을 위해 승인해준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의 형벌은 최대한 절제되어야 한다. 99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억울한 국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원칙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지금도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법적 처벌에 앞서 여론 재판이 먼저 시작된다. 봉건적인 풍경이다. 수사기관은 피의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이를 검증도 하지 않고 게시한다.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유 속에서 이미 피의자는 여론의 광장 속에 목이 걸린다. 앞서 말했듯 악과 싸운다는 이미지와 개인의 신체를 자신의 힘으로 구속할 수 있음을 보이는 이미지로 권력을 얻으려는 건 봉건국가의 술책이었다.

현대 여론 재판은 그 이전보다 더 잔인하다.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범죄 피의자는 혐의가 밝혀지기에 앞서 사생활부터 낱낱이 까발려진다. 유명한 사람일수록 그 효과는 극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범죄자를 찾는 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의 정당성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수사기관은 봉건국가의 수사기관을 보는 듯하다. 현장에서 열심히 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을 공무원들은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사기관의 수장들이 보이는 행태는 봉건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범죄 수사를 지휘하는지 궁금하다.

법치행정의 원칙

현 대통령은 여러 번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대통령의 말처럼 이 원칙은 너무나 중요하다. 과거 중세 시대 국가들은 왕이 자기 멋대로 행정 시스템을 운영했다. 자기 말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선구자들은 법치행정의 원칙을 마련했다. 왕의 통치행위라는 말로 수많은 악행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법에도 법치행정의 원칙이 들어와 있다. 행정기본법 8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행정작용은 법률에 위반되어서는 아니 되며,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와 그 밖에 국민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법률에 근거하여야 한다."

현대 법 체계에서 법치주의라고 말한다면 바로 이 원칙을 의미한다. 국가 행정을 임의로 운영하지 말고 법에 따라 하라는 것이다. 종종 이를 일반 국민에게 적용하여 국민이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것이다. 일반 개인은 그렇게 큰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엄연히 사적 자치의 원칙이 적용된다. 법치주의의 대상은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임을 확실히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마땅히 행정기본법 8조에 따라 법률에 근거하여 행정작용을 해야 한다. 하지만 몇가지 예시만 봐도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법률에도 없는 가짜뉴스센터를 만들고 국민의 언론의 자유를 제한했다. 거기에 더해 류희림 위원장은 현재 자기 가족과 지인들을 동원하여 '청부 민원'을 제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점입가경으로 법에 따라 공익 제보자를 보호해야 할 국민권익위원회는 행정 부작위, 즉 손 놓고 아무 일도 안 함으로써 국민의 권리가 침해하고 있다. 과연 이뿐만일까. 다른 국가기관도 마찬가지다. 법에 따라 예산을 써야 할 검찰은 어떠한가. 뉴스타파 보도로 제기된 특수활동비 유용 의혹을 보면 그들이 과연 법치주의를 따르는지 의문이 든다.

봉건국가의 왕들은 자신이 곧 법이라 규정하며 자신만은 치외법권을 누렸다. 자신이 법의 원천이니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자신들만은 법의 예외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결코 현대 민주공화국의 일원은 아닐 것이다.

평등의 원칙과 도덕적 해이

우리가 하나씩 따져봐야 할 수많은 원칙이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안 할 수가 없다. 올해 전세 사기로 수많은 사람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고, 목숨까지 끊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보호해주는 국가의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피해당한 억울하고 운 나쁜 개인일 뿐이다. 그들을 섣불리 도와주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낳는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기업으로 그 잣대를 돌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리한 부동산 개발 투자로 파산 위기에 놓인 기업은 세금을 투입하여 되살린다. 경제 여파를 고려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는 뻔하다. 그 기업이 파산 대신 구조조정을 택할 때 길거리로 내쫓기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경영상 필요에 의한 해고에 관한 우리 대법원의 판례는 기업에 매우 친절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장 위기가 안 닥쳐도 미래에 닥칠 위기로도 정리해고는 가능하다. 그러니 파산 위기에 놓인 건설사들의 해고 과정은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경영진들은 세금을 받아 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것일까? 자본수익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투자한 사람이 차지한다면, 마찬가지로 위험은 투자한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투자도 아닌 일상의 삶을 위해 전세를 얻은 세입자들은 자신이 위험을 책임지고, 정작 위험을 부담해야 할 회사의 경영진들은 위험을 회피하고, 국가는 이를 돕는다. 앞으로 부동산 PF 위기가 커질 때 제2금융권에 예금을 맡겨놓은 사람들의 운명이 궁금하다. 만약 은행이 위험에 처했을 때, 국가는 예금주들의 편일까, 아니면 은행 경영주들의 편일까.

대한민국은 공정과 상식,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희망을 담아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의 서문을 인용한다. 이 글은 지금 우리 사회에도 큰 울림이 되리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한쪽에서는 최고의 권력과 행복을 부여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약함과 비참함의 극치까지 끌어내리려는 경향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가장 현명한 법은 이런 시도에 반대하고, 법의 영향력을 보편적이고 평등하게 확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가장 중요한 규정들을 뛰어나고 현명한 제도에 의지하기보다 신중함을 확신할 수 없는 소수의 특권자에게 맡겨버린다.

그 때문에 생명과 자유라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에 수많은 오판을 겪는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을 억압하는 해악을 바로잡기 위해 가장 명백한 진실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속한 정신에서 벗어나 대상을 분석할 능력이 없고 수없이 무차별적인 인상만 받을 뿐이다. 그래서 스스로 조사해서 얻은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견해에 휘둘리는 데에 익숙해진다.

역사를 살펴보면 법은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의 계약이며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소수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쓰이거나, 우발적 또는 일시적인 필요로 생겨났다. 지금껏 인간성을 현명하게 탐구해 인간의 행동을 한눈에 통찰한 법은 없었다. 법은 오로지 '최대 다수가 공유하는 최대 행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

태그:#공정, #원칙,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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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이 누군가에겐 낯설게 느껴졌으면 합니다. 익숙함은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세상을 낯설게 바라볼 때 비로소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디서나 이방인이 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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