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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일 보성 벌교의 평범한 10대 여학생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70대 노인의 차량에 숨진 비극적인 일이었다. 여고생의 모든 것이 한순간 사고로 허물어졌다. 가족의 슬픔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곁에서 함께 생활했던 친구와 선생님의 상실은 컸다.

"선생님께서 출석을 부르면 '네'하고 대답할 것만 같은데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어요. 슬픔을 마음으로 간직한다는 일이 꽤 힘든 일이란 사실은 다른 친구들을 보며 알 수 있었지요. 존재했던 친구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어요."(정예원 학생)

살아남은 자들의 무거운 짓눌림은 서로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육체적 죽음에 도달한 친구에 대한 미안함, 상처를 꺼내는 것보다 마음 구석에 간직하는 편이 나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11월 어느 날, 4월부터 수필 쓰기 수업을 해왔던 벌교고 국어 담당 이윤정 선생님은 학생들의 글을 읽게 되었다.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가연(가명)을 떠올리며 쓴 글들이었다. 같은 반 친구, 옆 반 친구, 선배는 친한 동료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용기를 냈다. 수필을 쓰며 삶에 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꽤 의미 있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가연에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리움, 아쉬움, 미안함, 추억들이 글로 표현되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도, 회복, 다짐, 희망찬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장소영 학생의 殘(잔)이라는 글과 학생의 생각을 옮겨본다.
 
피아노 선율에 몸을 맡기며
화려하게 춤을 추는 가락가락이
입매로 새어나가고
건반위로 여행을 떠나는
손가락 하나하나의 곡예에
눈을 맞해본다.
피아노는 여전히 선율을 이루지만
여행 떠난 건반 위 곡예에는
그녀의 웃음만이 일렁인다.

죽음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는 말이 실감합니다. 커피처럼 쓰기만 했던 가을, 에세이에 담긴 이야기는 그 누구도 원치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가을과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가까운 이의 영혼을 기리는 일은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아리고 무서웠습니다. 우리는 친구를 떠나보내는 에세이를 썼습니다. 친구가 저희의 이야기를 읽을 수 없겠지만, 이야기들이 모여 친구에게 닿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벌교고등학교 학생들의 글을 읽다 보면 정수복 작가의 <책인시공>의 구절이 떠오른다.

'책은 절망의 치료제다. 책은 희망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다. 조용히 책을 펼치는 사람에게 책 속의 글자들은 희망의 소리를 전한다.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나 인생의 위기를 맞는 사람들에게 책은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중략) 절망의 웅덩이에서 우리를 끄집어낸다. 배우자나 자식,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나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없을 때 책은 가까이 다가와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언어의 미학 표지
 언어의 미학 표지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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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허망한 죽음을 곁에 둔,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과 절망은 후회로 이어지고, 후회는 용기와 희망을 불러냈다. 용기와 희망의 단어들이 모여 글이 되었고, 책이 되었다. <언어의 미학: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벌교고등학교 학생들이 쓴 책을 우울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전남교육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벌교고등학교,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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