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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타계를 보도하는 AP통신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타계를 보도하는 A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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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각) 코네티컷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해외에서 출생한 첫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끌며 국제질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의 정상회담 성사를 이끄는 등 미·중 수교의 산파 역할을 했고, 구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조성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닉슨-마오쩌둥 정상회삼 성사... 미중 수교 발판 마련

1923년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키신저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1938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고, 미국 시민권을 얻은 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공부하고 같은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69년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본격적으로 관료의 길에 들어선다. 

키신저는 이념이나 도덕보다는 힘과 국익을 쫓는 현실주의로 미국 외교를 이끌었다. 1971년 7월 미국 최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을 극비 방문해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미중 관계 개선을 논의했다. 

이는 다음 해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 주석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으로 이어졌고, 미중 수교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베트남전쟁의 승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평화 협정을 체결시켰고, 이런 공로를 바탕으로 북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둑토와 함께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다만 레둑토는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다"라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 밖에도 중동 분쟁이 격화되자 중재자로 나섰고,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성사시켜 긴장 완화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키신저는 대통령에게 필적하는 권력을 갖고 냉전 시대 위기를 다뤘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1975년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 회담'을 제안했다. 한국을 자주 방문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등 역대 대통령을 두루 만나기도 했다.  

키신저 외교의 '빛과 그림자'

그러나 수많은 업적에도 눈앞의 이익만 쫓으며 장기적 질서를 외면하고, 때로는 타국의 정치에도 과도하게 개입하거나 독재 정권의 인권 탄압에 눈을 감았다는 등 비판도 뒤따랐다. 

AP통신은 키신저에 대해 "압도적인 권력과 존재감으로 국제 정세에 흔치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노벨평화상과 비난을 모두 받았던 인물"이라며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그의 외교 업적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평가했다.

키신저는 1977년 국무장관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으나 왕성한 활동력으로 세계 외교 현안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컨설팅 기업 '키신저 어소시에이츠'를 설립해 다국적기업의 자문을 맡기도 했다.

100세 생일을 맞이한 지난 5월에는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세계가 '무질서'해졌다"라며 미중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7월에는 중국을 깜짝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기도 했다.

그는 5월 미국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의 무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나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국의 '외교 대통령'으로 전 세계를 누볐던 키신저는 공교롭게도 미중 관계가 다시 최악으로 치닫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태그:#헨리시킨저, #미국, #미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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