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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기자말]
오늘날 축제란 무엇일까. 매년 2월에 열리는 니스 카니발은 세계 3대 축제라고 한다. 이런 순위나 클래스는 누가 정하는 걸까. 특히 2023년은 150주년이니 놓치지 말라는 여행책의 권고에 아주 쉽게 유혹 당했다.

니스로의 일정을 정하고 축제 홈페이지에 들어가본다. 거리 구역별 예매 창구가 뜬다. 항목은 낮의 '꽃전투', 밤의 '빛의 퍼레이드' 등이다. 결국 퍼레이드 관람이구나. 아이가 아니었으면 굳이 선택하지는 않았을 코스였다. 난 무엇을 보고 즐기게 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 예매를 마쳤다. 대개의 여행 코스가 그렇듯이.

낮 퍼레이드가 먼저 예매되어 있었다. 예매에 늦장을 부린 탓에 우리 자리는 거리 외곽의 입석이었다. 긴 줄을 기다려 어떻게든 펜스 근처에 머물러보려고 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퍼레이드가 지나가기 시작했으나 머리 꼭대기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 데리고 온 아이들을 무등을 태우기 시작했다. 내 허리는 아직 세비야에서의 부상에 신음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우주를 사람들 사이에 파묻히게 둘 수는 없었다. 무등을 시도해서 성공한다면, 내 허리는 괜찮은 거라고 생각하자.
  
니스 카니발 '꽃 전투' 퍼레이드 앞에서. 무등을 태워야만 시야 확보가 되었던.
▲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니스 카니발 '꽃 전투' 퍼레이드 앞에서. 무등을 태워야만 시야 확보가 되었던.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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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데에서 다 오는 니스 카니발

무거운 역기를 다루듯 최대한 신중하게 허리를 직립하여 무등을 태웠다. 생각보다는 할 만했다. 우주의 시야가 열렸다. 우주는 자신의 역할인 '신나게 퍼레이드 보기'를 잘 수행해주었다. 나는 아이 아래서 무등 태운 부모간에 치열한 자리 싸움을 진행 중이었다. 모두들 자기 아이를 향한 미소와, 자기 신체의 피로와, 옆 사람에 대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밀리면 끝장이다.

살짝 발을 끼워넣어봤다가 밀려났다가 살짝 비벼보다 눈싸움하다가... 조금만 옆으로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가 '나도 안 보인다'는 퉁명스런 대답을 받는다. 그래 모두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이다. 기껏 왔더니 이런 자리를 자신이 예매해 놓은 것이다. 어쩌겠는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초등학생은 가벼워도 무겁다. 체육 예능 미션을 버티는 기분으로 퍼레이드에 임했다.

그 와중에 슬쩍슬쩍 보이는 퍼레이드는 화려했다. 퍼레이드단은 관객들에게 종종 꽃을 던져주었다. 우주와 난 그 꽃을 받았다. 사람들의 바다에 용해되었다가 다시 해수면으로 돌아오는 기분으로, 우린 낮 퍼레이드를 보고선 근처 식당에 들어가 지친 다리를 달래며 피자를 먹었다.

숙소에서 한숨 쉬고 다시 밤 퍼레이드인 '빛의 퍼레이드'를 보러 나올 차례였다. 밤 타임은 더 좋은 안쪽 자리였다. 입석이긴 했지만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바로 옆에 주저 앉아 볼수도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니스를 다니는 동안 이 꽃을 소중히 가방에 꽂고 다녔다.
▲ 퍼레이드단이 던져준 꽃 우리는 니스를 다니는 동안 이 꽃을 소중히 가방에 꽂고 다녔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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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제서야 퍼레이드의 면면이 제대로 보였다. 퍼레이드의 전체 콘셉트는 '지구촌'이었다. 전 세계의 문화를 각각 배분하여 거대한 조형물이나 특수 차량을 타고 지나가기도 하고,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 세대의 사람들이 다 있었다. 우주 또래의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70대 이상으로 보이는 노인들까지.

대체 어떻게 이것들을 다 준비한 거지? 각종 공동체 단위로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불가능해보이는 준비물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진행한 것일까. 다음 날 택시 기사에게 물어본 바로는, 온갖 데에서 다 온다고 한다.

니스는 물론이고 프랑스 전역에서 준비를 해오는 것 같았다. 대형 차량이나 구조물, 미술이나 의상은 어떻게 제작, 배분을 하는 걸까? 무엇보다, 학교를 제외하면 이들은 어떤 공동체를 바탕으로 해 이 준비를 하는 것일까?
  
차량에 설치된 대형 구조물들이 많아 퍼레이드의 높낮이와 화려함이 다양하게 유지된다.
▲ 화려한 거대 구조물 차량에 설치된 대형 구조물들이 많아 퍼레이드의 높낮이와 화려함이 다양하게 유지된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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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동화 속 의상 같은 것을 입고 율동을 하며 지나가고, 어린 아이들이 귀엽게 실룩실룩 춤을 추며 색종이를 뿌린다. 남성미 넘치는 강인한 북춤 퍼레이드 이상으로,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 여성팀의 춤 이상으로, 아이들과 노인들의 퍼레이드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조화로웠다. 우주는 또래 아이가 뿌려주는 색종이를 너무나 좋아했다. 땅바닥에 떨어진 색종이를 그러모아 다시금 퍼레이드 단에 뿌려주는 데에 온 정성을 다했다.
  
강인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 역동적인 북 연주단 강인한 아름다움이 넘친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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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가 넘치는 악사님
▲ 관광객에게 표정을 서비스 해주는 악사 에너지가 넘치는 악사님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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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구조물 위에서 눈 뿌리듯 색종이를 뿌려주는 어린 아이들
▲ 색종이를 뿌려주는 꼬마 신사 숙녀들 대형 구조물 위에서 눈 뿌리듯 색종이를 뿌려주는 어린 아이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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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 중에는 익히 예상되듯, '강남스타일'도 나왔다. 한국인 학생들로 조직된 풍물패도 지나갔다.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풍물패는 우주를 보더니 '어머 안녕~ 여행 왔어? 귀엽다~!' 인사해주며 지나갔다. 우주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와 한국이다, 한국이야!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세계의 카니발, 하면 빠질 수 없는 우리의 풍물패
▲ 한국인 풍물패 세계의 카니발, 하면 빠질 수 없는 우리의 풍물패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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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나를 순식간에 20년 전으로 데려갔다. 2003년 친구들과 사물놀이 거리공연을 왔던 때로. 학교 동아리에서 풍물에 매혹된 이후로, 해외의 거리에서 우리 풍물을 쳐보는 것이 당시의 꿈이었다.

원래는 프랑스 아비뇽 연극제 거리공연을 노렸다. 그러나 하필 당시 연극제가 파업으로 취소됐다. 그렇게 된김에 우리는 가고 싶은 데를 정해 악기를 짊어지고 배낭여행을 다니다, 만만해 보이는 곳에 자리를 폈다(지금이라면 대번에 제지당했을 것이다).

풍물 악기의 음량이 좀 큰가. 그때도 결국 제지는 당했지만 사람들의 아량과 호기심이 지금보다는 있던 때였다. 프랑스에서, 독일에서, 스위스에서, 사물놀이 장단을 울리고 북춤을 추고 연풍대를 감았다. 우리를 보고 너무나 반가워하던 한국인 이민자들과 관광객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거기서 20년이 지나 이제 내가 어린 아들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 젊은 악사들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춤사위를 바라보며.
  
그 시절 친구들과 공연하던 모습
▲ 2003년 프랑스 센 강변에서의 사물놀이 거리공연 그 시절 친구들과 공연하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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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유일하게 북춤을 선보일 수 있던 날이었다.
▲ 2003년 스위스 국경일의 거리 공연 당시 유일하게 북춤을 선보일 수 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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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드에 푹 젖은 하루

우주와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퍼레이드에 푹 젖었다. 그래 맞아, 이런 게 축제였지. '관람'이 아니라, 그냥 풀어져 버리는 거.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기라도 한 듯,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같이 호흡하는 거. 세상 어디에나 혐오가 판치고 파괴와 소외는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그 와중에도 이런 순간을 만들어보는 게, 인간들이 해내는 일이었지.
  
고마운 소녀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아빠의 마음
▲ 우주에게 눈을 마주치며 색종이를 뿌려준 소녀 고마운 소녀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아빠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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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이날 퍼레이드 길에서 주워모은 색종이들과 종이 실 등을 소중하게 모아 지퍼백에 넣었다. 난 그게 짐이 되고 깨끗하지 않을 테니 버리고 가자고 설득해 보았지만 우주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비닐 지퍼백은 아직도 서울 우리 집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아마도, 난 그걸 20년 이상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주가 집을 구해 이사를 나갈 때, 난 우주에게 그 지퍼백을 안겨줄 것이다.
  
사금 캐듯 색종이를 그러모으는 소년
▲ 우주의 색종이 수집 사금 캐듯 색종이를 그러모으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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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글을 쓰며 잠시 눈을 감고 40년의 시간을 반을 접어 포개어 느껴본다.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와, 20년 후의 나를. 세상과 삶의 한 가운데 선 나의 존재를. 그간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그리고 아들의 존재를. 나의 우주의 존재를.
 
이 날의 분위기를 잊을 수 있을까.
▲ 신난 아이들 이 날의 분위기를 잊을 수 있을까.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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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꽃보다소년, #프랑스, #니스, #카니발, #아빠와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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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출합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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