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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이 넘어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일들로 꽉 채우고 싶었던 주부안식년에 '나 홀로 여행'은 나의 가장 큰 꿈이자 부담스러운 숙제였다. 베스트셀러 책은 꼭 읽어봐야 하고, 천만 관객을 넘긴 흥행 영화는 꼭 봐야 하고, 맛집은 찾아가서 꼭 먹어보고 싶어 하는 나는 몇 년 전부터 방송과 SNS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혼자 하는 여행이 너무나 궁금했다.

누군가는 혼자 여행의 좋은 점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그게 어떤 느낌일지 와닿지 않았다. 그저 내가 혼자서 여행을 하려는 이유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혼자 놀기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혼자 떠나는 여행
 
동궁과 월지의 아름다운 야경
 동궁과 월지의 아름다운 야경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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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나와 달리 남편은 여행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행 스타일도 서로 달라 나는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바쁘게 돌아다니는 스타일이라면, 남편은 느긋하게 쉬엄쉬엄 다니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라서 함께 다니면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이제 모두들 아이들에게서 자유로워져 시간 여유가 생겼지만 갱년기에 접어든 우리는 돌아가면서 아픈 곳이 생기기 시작했고, 어쩌다가 어렵게 시간을 맞춰도 예기치 않게 부모님의 병시중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생겨 번번히 취소되고는 했다.

그래서 혼자서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혼자서는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남들 보기에 청승맞아 보이지는 않을까, 또 위험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난데없는 빈대 걱정까지 여행을 가기도 전에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늙어서 누군가가 같이 놀아주기만을 기다리며 심심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 혼자 노는 연습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20년만 젊었어도 배낭 하나 메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젊은 청춘들처럼 여행을 하고 싶지만, 처음 혼자서 해보는 여행에 거창했던 계획은 점점 줄어들어 결국 2박 3일간의 경주 여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운전실력이라고는 겨우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줄 수 있는 정도밖에 안되는 나에게 경주는 기차로 갈 수 있고, 그 안에서도 버스를 이용하거나 주로 걸어다닐 수 있어서 적당할 것 같았다. 게다가 오래전에 경주를 겨울에 갔던 탓에 안압지(동궁과 월지)의 멋진 야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내내 마음에 남아있어서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평소 가족들과 여행 다닐 때와는 다르게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걷고 싶을 때 걷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녹음도 없고 단풍철도 지나 경치는 조금 아쉬웠지만 대릉원을 거닐며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동궁과 월지의 아름다운 야경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 불국사 옆 숲길을 혼자 걸으며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잠깐의 고요를 느껴보기도 했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여행 내내 긴장하며 다녔던 그동안의 여행과는 많이 달랐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할 때는 내가 느끼는 재미보다 가족들의 기분에 더 많이 신경을 썼다. 여행하면서 가족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여행의 감상을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었어도 좋았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북천년의숲정원
 경북천년의숲정원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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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여행을 하다 보니 난감한 상황도 있었다. 지름길을 찾느라 한밤중에 대릉원에 잘못 들어갔다가 너무 무서워서 등에 식은땀이 나기도 했고, 순환버스의 방향을 잘못 알고 헤매다가 하루 네 번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놓치기도 했고,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갔다가 2인 이상 주문만 가능하다고 해서 그냥 나오기도 했다.

여행 첫날 저녁,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숙소로 가는 길에 집 생각이 나면서 잠깐 울적해지기도 했지만, 혼자 쓰기에 넓고 쾌적했던 호텔 방에 들어서자 금방 기분이 나아졌다. 다시 생각해봐도 첫 여행에 다소 비싸지만 좋은 숙소를 고른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불국사
 불국사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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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
 대릉원
ⓒ 심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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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맞이한 둘째 날 아침이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커피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보는데 이유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갱년기에 접어들어 널을 뛰는 변덕스러운 감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대접받는 기분이었고 '그동안 수고했다'고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50이 넘은 아줌마가 혼자 여행을 떠나기까지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해보니 별로 심심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남들의 시선도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너무 달라서 힘들게 느껴지는 남편이지만 여행지에서 전화로 듣는 남편의 목소리는 참 따뜻하게 들렸다. 다시 돌아갈 집이 있고 나를 반겨줄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졌다.

혼자서 여행을 한 것이 아마도 나의 안식년에 제일 잘한 일이 될 것 같다. 용기 내기를 잘했다. 앞으로도 나이에 눌려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래서 다시 힘을 얻고 싶어질 때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태그:#주부안식년, #경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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