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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지만 아주 다른 사람들, 농사 짓는 부모님 vs. 마케터 딸이 함께 농사일 하는 이야기.[기자말]
"우리도 네모 반듯한 논을 농사 지으면 되잖아요!"

어쩐지 화가 섞인 것 같은 물음. 어머니는 여기에 코웃음을 치시며 '정리된 논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나?'라고 대답하신 것 같다. 듣자마자 어리석다고 할 만한 질문 목록이 머릿속에 한가득 떠올랐다.

진로가 안 보여 고민인 학생에게 "일단은 좋은 대학에 가야지", 또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큰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거나,  우울한 사람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좀 많이 해봐"라는 식으로 변주 되는 얘기들 말이다.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해버렸네, 그것도 어머니께. 가을 안부를 묻다가 논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됐다.

농사만큼 시기를 예측하기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때 맞춰서 준비하고 돌보고 수확을 한다. 그러나 농사에도 달력을 벗어나는 일이 있다. 봄에 모내기를 하고 10월에야 수확을 하는 논농사의 일정에 갑자기 9월에 벼를 베야 한다고 부모님은 말씀하신다. 이게 다 여름의 비 때문이다. 도시와 다르게 농촌에는 여름의 비가 다른 계절에도 남는 것만 같다. 

도시의 비, 농촌의 비 
 
벼가 익어가고 있는 모습
▲ 논 벼가 익어가고 있는 모습
ⓒ 최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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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여름에도 가을에도 비가 많고 잦았다. 도시에 있으면 비는 큰 일을 내고도 금세 사그라드는 것 같아, 지나고 보면 비가 내린 적이 거의 없었던 것처럼 망각하게 된다.

농촌의 비는 어떨까. 비는 사라지지 않고 다음 계절에도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고, 농촌과 도시 간에 시간을 인식하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비가 순환한다는 것을 (배워서)알지만, 그 뜻을 체감해서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 만약 도시에서 산다면 말이다. 비가 보이지 않게 처리가 되기 때문일까. 아스팔트의 비는 수일 내 마르게 된다.

하지만 농촌의 논과 밭에는 그제의 비가, 한 달 전의 비가, 한 계절 전의 비가 꾸준히 오늘까지 영향을 준다. 비가 오면 당장 땅이 질어지거나 빠지게 되므로 일하기 어렵고, 약을 주는 일정이 있다면 비를 가려서 해야 하고, 비가 온다면 수확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필수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여름에 내린 비로 인해 가을에 해야 할 일이 불어나기도 한다. 9월 중순에 벼를 베는 일처럼 말이다.

"벼를 베야지."
"벼를 벤다니요, 무슨 벼를 벌써 베시나요."
"여름 내 '엎친'(엎어진) 베를 벼야 혀. 큰일이다."

 
엎친 논의 예. 중앙에 자세히 보면 벼가 쓰러져 있다
▲ 엎친 논의 예 엎친 논의 예. 중앙에 자세히 보면 벼가 쓰러져 있다
ⓒ 최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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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왈 여름날 쏟아지는 비 앞에서 벼가 스스로를 곧게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결국 엎친 벼를 제때 일으켜 세우거나 베지 않으면 나중엔 벼가 썩어서 피해가 더 커진다고 하신다. 나는 말한다.

"아부지가 고생이시겠네요."
"기계가 들어가야 혀. (엎어진 벼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다 못 벤다."


어머니께서 "그려, 니 아부지가 고생이지"라고 답하실 줄 알았으나 그 자리에 '기계'가 들어왔다. 나는 얼른 낫에서 콤바인으로 바꿔 엎친 면적의 스케일을 다시 생각한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의 시선은 논둑 위로 날라 당신이 짓는 논을 조감하고,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다.

"남들처럼 경지 정리가 딱딱 된 논이면 얼마나 좋겠냐. ... 우리 논은 남들 짓고 남은 논들 뿐이라서, (발이) 쑥쑥 빠지고 벼가 엎치기도 많이 엎쳐."

보통의 논이... 어떻게 생겼더라

음? 어머니가 말한 '경지 정리'란 무엇인가. 보통 논은… 대개 네모 반듯하게 생기지 않았나. 나는 논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의아해 한다. 본가에 오면 수없이 많은 논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 지나칠 수 있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 다 논이지만, 많이 봐왔지만 실제로는 논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 그저 눈으로만 봤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나 논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면 직접 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발로 지형을 밟아봐야 한다. 그것도 사계절을 말이다. 논은 경작에 필요한 물을 가두거나 배수하기 때문에, 계절과 함께 물렁물렁 해졌다가 단단해지기를 반복한다.

토질이 어떤지 논을 갈아봐야 알고, 배수가 어떤지 논에 물을 대봐야 안다. 이양기로 모를 심고, 논을 돌보고... 수확 뒤 남은, 서릿발이 오른 볏둥(벼를 베어낸 자리) 사이를 걸어 지나가봐야 비로소 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모 반듯하지 않고, 옛날 방식으로 만들어져 구불구불하게 생긴 논. 그래서 발도 빠지고 기계도 빠지고 벼가 많이 엎치는 논. 그게 우리 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지 정리가 안 된 논은 농사 외에 다른 면에서 유리할 수 있다(용도를 변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30년 넘게 용도를 변경한 적이 없으니 여러모로 농사짓기에는 어려운 논을 가지고, 빠지고 엎치면서 논농사를 져왔다고 할 수 있다.

수능을 친 모두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갈 수 없듯이, 원하는 누구나 대기업에 들어갈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순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속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순위 매기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고 그것만큼 성공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일도 없으니까.

거창하게 말했지만 좋은 삶이란 그냥 자신을 사는 것 아닐까. 네모 반듯한 논을 갖지는 못했고 큰 비로 인해 수확하기도 전에 벼를 베게 생겼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올해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해 보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지난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자신이 동메달을 딴 소식을 뒤늦게 리포터로부터 듣고, '내가 3등을 했느냐'며 눈이 커져 환호하던 어떤 여자 중국 수영선수가 생각난다. 소식에 기뻐하던 그 모습에는 순위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과, 자신이 일군 성과만을 보는 시선이 담겨있었다. 주변과 비교하고 평가하고 더 올라가야 한다고 부추기는 시대에, 3등임에도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화제가 됐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진짜'를 봐서 감동한 게 아니었을까.

그 비슷한 표정을 부모님에게서도 본다. 자기 땅은 아니어도, 좋은 밭이라며 그걸 기뻐하는 모습에서. 그리고 30여년 간 한결같이 고생을 안겨주지만 그래도 '당신의 논'이라서, 엎친 벼에 대한 실망 대신 묵묵히 남아 있는 벼를 위해 쓰러진 벼를 베러 들어가는 부모님 뒷모습에서 말이다(관련 기사: "꿈을 이뤘네" 고구마 캐던 엄마의 고백  https://omn.kr/25vke ).

그 모습이 안쓰럽고 속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하는 건 남은 논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지금껏 애써 보살핀 벼농사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남아 있기에 하시는 일일 테니까.
 
콤바인으로 수확 중인 아버지 모습
▲ 수확 콤바인으로 수확 중인 아버지 모습
ⓒ 최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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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9월 말, 부모님은 여름의 비에 엎친 벼를 다 베어내고는 11월 초, 벼 수확을 마치셨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될 수 있습니다.


태그:#논농사, #벼농사,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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