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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아시아 작가를 꼽으라 하면, 적잖은 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말할 것이다. 서구사회에 널리 알려진 몇 안 되는 아시아 작가이자 확고한 지지층을 바탕으로 꾸준히 작품을 생산해온 왕성한 소설가인 그가 올해 또 한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최상단에 올라선 뒤 내려올 줄 모른다. 더없이 하루키답다는 평가 속에서 순항하는 이 소설의 매력이 대체 무엇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소설이 가진 매력을 충분히 느껴본 적 없다 해도 좋겠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태어난 영화, 이를테면 <버닝>이라거나 <토니 타키타니>를 흥미롭게 보기도 했으나, 그건 원작소설보다는 영화가 지닌 매력에 기댄 바 크다고 여긴다.

하루키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흥미롭게 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하루키의 많은 작품 가운데 조금쯤 스타일을 달리하는 작품이라 보아도 좋겠다.

이 시대 세계문학계의 거장임을 부인할 수 없는 하루키를 폭넓은 독서가이길 원하는 나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가. 무려 750페이지가 넘는 이 두터운 소설책 첫 장을 열며 내가 기대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책 표지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책 표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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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하루키의 세계

통상 소설을 소개하기 위해선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게 필수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소설이란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이가 무엇을 겪어내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공이 맞이하는 이야기가 곧 소설의 내용이며, 줄거리가 된다. 그로부터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나 따로 떼어 이야기할 만한 의미 등을 찾게 되니 줄거리는 캐릭터며 문장과 함께 소설의 핵심적인 요소라 할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두 세상을 오가는 인물의 이야기다. 처음 주인공은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으로, 저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와 그녀는 서로를 사랑했으나 마침내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어떠한 이유인지 비현실적인 세계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여자와 재회한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저와 사랑을 한 기억을 잊었으나 그는 그녀가 자신이 사랑한 여자란 걸 확신한다. 그는 오로지 그녀와 함께하기 위하여 이 기묘한 마을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이 환상의 세계는 이 책의 중요한 설정을 이룬다. 두 세계의 관계는 물론, 두 세계를 오가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주인공을 따라 독자들은 이 낯선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이 세계에는 책이 한 권도 없는 도서관이 있고, 제 눈에 상처를 낸 이가 알 같은 무엇에 담긴 꿈들을 꺼내어 읽는다. 도서관엔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추운 날이면 난로에 장작을 넣고 진한 차를 우린다.

이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선 그림자를 본체와 분리해야 한다.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가 그림자를 떼어놓은 이들만 벽 안으로 들여보낸다. 벽은 마치 내장의 벽처럼 울컹울컹 움직이며,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만큼 온전한 것처럼 보인다.

벽 안팎을 오가는 짐승들 가운데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단각수가 있다. 벽 밖에는 사과나무도 심겨 있다. 벽 안에서 살아가는 그림자 없는 이들의 세상, 그리고 현실 세계를 오가며 소설은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침내 완성된 목에 걸린 가시 같던 소설

현실과 환상을 오가면 오갈수록 대체 무엇이 진짜 세계인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십대부터 사십대에 이르는 시간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주인공은 제게 중요한 것을 하나도 갖지 못한 것처럼 뻥 뚫린 삶을 살아간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그 공백을 채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열의 없는 일을 하며 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삶을 사는 외로운 인간이 오로지 그 하나뿐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알지 못하고, 그를 오가는 법도 알지 못하며, 종국엔 무엇이 현실이고 환상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 불확실한 삶이 오늘의 독자에게 호소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루키 소설의 장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감각과 그 감각이 불러오는 이미지를 생생히 펼쳐내는 문장이 두드러진다. 소설을 읽고 있자면 소년과 소녀가 만나는 풍경이며 떠오르고 가라앉는 여러 순간들, 환상의 도시와 울렁이는 벽과 메마른 개울, 낡은 다리가 눈앞에 선하게 펼쳐진다. 그가 자주 불러와 활용하는 음악과 술과 음식 또한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를 좋아하는 독자를 만족으로 이끈다.

다만 명확하고 뜨거우며 박동하는 무엇을 찾는 독자는 길을 잃기 쉽다. 흩어지고 기능하지 못하는 인물과 사건, 장치들, 분위기를 제하면 좀처럼 멋을 찾기 어려운 이야기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말 그대로 취향을 많이 타는 소설로, 삼십대 초반에 쓴 작품이 아주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새로 나온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나 40년의 시차를 건너 하루키는 묻어두었던 작품을 다시 쓰기로 결정했다. 거장이 끝내 이 작품을 꺼내 오늘의 독자 앞에 보이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에 이르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던 미완의 소설을 마침내 뽑아낸 하루키에게, 그의 소설을 그보다도 반겨주는 충직한 독자들에게,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다가섬을 멈추지 않는 또 다른 문학 애호가들에게 응원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은이), 홍은주 (옮긴이), 문학동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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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시와그불확실한벽, #무라카미하루키, #문학동네, #홍은주, #김성호의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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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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