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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전탑. ⓒ 성낙선

여주 신륵사는 상당히 긴 역사를 간직한, 유서가 깊은 절이다. 그런 만큼 신륵사처럼 귀한 보물들을 간직한 절도 그렇게 많지 않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보물이다. 풍경도 다채롭다. 신륵사는 특히 대다수 다른 절들과 달리, 강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신륵사 강변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여주를 대표하는 풍경 중에 하나로 꼽힌다.

따라서 신륵사를 여행할 때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오래 들여다봐야 한다. 때로는 넓게 때로는 좁게 보아야 한다. 넓게 봤을 때는 절과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엄한 풍경에 매료된다. 그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지극히 평온하게 만든다. 가만히 앉아서 강변 풍경을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좁게 봤을 때는 경내 구석구석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고매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정감이 감도는 보물들이다. 때로는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하는 뜻밖의 즐거움을 맛볼 때도 있다. 신륵사에서는 그렇게 절 구석구석을 세세히 돌아보는 재미가 있다. 신륵사를 자세히 보게 되면, 결국 신륵사가 가진 보물의 진가를 알게 된다.
 
신륵사 극락보전 앞 다층석탑. ⓒ 성낙선

대찰의 면모는 사라졌어도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진평왕의 재위 기간은 579년에서 632년까지다. 그러니까 신륵사가 이 무렵에 창건된 게 맞다면, 그 역사가 약 1500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건 이래, 장구한 역사를 지나온 것이다. 시대 상황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었다. 그러면서 여러 차례 재건과 중수를 거쳤다.

천 년 역사를 간직한 고찰들이 대개 그렇듯이 신륵사도 대찰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배불정책으로 절의 위세가 크게 위축됐다. 그러다 1469년에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이 된 이후 대규모 중창불사가 이어졌다. 성종 때인 1472년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하거나 신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왕궁에 버금갔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보제존자 석종비,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 성낙선
신륵사 대장각기비. 험난한 세월이 함께 새겨졌다. ⓒ 성낙선

물론 오늘 우리가 보는 신륵사는 그때와 다르다. 그렇다고 대찰의 면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신륵사에 남아 있는 보물들이 그런 과거의 위상을 짐작게 한다. 신륵사는 일종의 보물창고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신륵사에서는 보물을 찾는 것보다 보물이 아닌 것을 찾는 게 더 힘들다. 그동안 갖은 전란과 수난을 겪으면서 숱한 보물이 사라졌는데도 이 정도다.

현재 신륵사 보물로는 조사당(보물 제180호),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이 문화재 목록에 올라 있다. 이 보물들이 신륵사가 과거 어떤 절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신륵사 은행나무. ⓒ 성낙선

600년, 기품이 서린 나무들

사실 신륵사는 절 전체가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지정 보물은 물론이고 절 마당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아름드리 거목들도 보물의 대열에 넣어야 마땅하다. 이 나무들의 연수가 대략 600년이다. 오랜 역사 속에 신륵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봤을 이 나무들이 신륵사를 기품이 있는 절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륵사 일주문을 지나 경내 안쪽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높고 넓게 가지를 벌린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수형이 아름다운 은행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독특한 면모를 지녔다. 몸통 한가운데 관세음보살상을 닮은 짧은 가지가 돋아나 있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신륵사 은행나무 몸통 한가운데, 관세음보살상 모양의 짧은 가지. ⓒ 성낙선
신륵사 조사당 앞 향나무. ⓒ 성낙선

이 나무는 고려 후기 선사인 나옹화상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나무 옆으로는 참나무 한 그루가 은행나무보다 더 높이 가지를 뻗고 있다. 절에서 참나무 거목을 보는 일이 흔치 않다. 이 나무는 밑동의 둘레가 약 4m이고 높이는 약 32m에 달한다. 보기 드문 크기다. 이들 나무 모두 수령 600년을 자랑한다. 이 나무들 역시 그 가치를 함부로 따질 수 없는 보물들이다.

조사당 앞에는 한눈에 봐도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향나무가 있다. 이 나무도 수령이 600년이다. 이 향나무도 다른 나무들 못지않게 풍모가 남다르다. 키는 낮지만, 옆으로 넓게 뻗은 가지와 거친 수피에서 진한 세월의 향기가 묻어난다. 이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허리를 수그려 손자를 품에 안으려고 하는 자상한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신륵사 동쪽의 낮은 언덕에서는 붉은 소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자란다. 소나무들이 허리가 살짝 구부러진 채 그늘이 짙은 숲을 형성하고 있다. 연수는 그리 오래되지 않지만, 이 소나무 숲도 신륵사가 자랑할 만한 보물 중에 하나로 넣을 만하다. 이 소나무 숲은 찾아오는 사람이 그다지 많다. 호젓한 분위기 속에 조용히 산책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강변 정자인 강월헌. 그 주변을 둘러친 '출입금지' 금줄이 사람들이 강가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 4대강사업 이후 달라진 풍경 중에 하나. 4대강사업으로 남한강 수심이 상당히 깊어졌다. ⓒ 성낙선

신륵사 버드나무는 죄가 없다

신륵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보물들 중에는 버드나무도 있었다. 지금은 4대강사업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에는 강변 육각 정자인 강월헌에서 내려다보면, 남한강 강변 둔치에 버드나무들이 거대한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버드나무들이 또 신륵사 강변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4대강사업이 진행되면서 그 버드나무 군락지가 파괴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전란 속에 보물들이 사라지듯이, 사람들은 이때도 신륵사에서 보물이 사라지는 걸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신륵사 버드나무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보물이 아니었다. 4대강사업이 끝난 뒤, 신륵사에서 버드나무 군락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불교환경연대 중심으로 2017년부터 남한강을 비롯해 4대강 강변에 버드나무를 심는 사업이 본격화됐다. 버드나무를 심어서 4대강을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계획이었다. 이 사업에는 신륵사, 여주환경운동연합 등도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버드나무 군락지를 되살리는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2010년 4대강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의 남한강. 신륵사 강변 바위 위에서 바라다본 풍경. 강바닥을 파헤치면서, 버드나무 군락지가 검은 흙을 드러내며 완전히 파괴됐다. 이후 강변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2010년 6월 19일 촬영. ⓒ 성낙선
 
신륵사 강월헌 정자 아래 부서진 채 방치된 팻말. 팻말에 "불교환경연대, 여주환경운동연합, 신륵사가 공동으로 여강의 자연성 회복을 위해 왕버드나무 숲을 조성하였습니다. 왕버드나무가 잘 자라서 뭇생명들의 쉼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7.10.28"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적혀 있다. ⓒ 성낙선
 
버드나무를 심은 자리에는 그 취지를 알리는 안내문이 기다란 팻말 형태로 설치됐다. 팻말에는 '남한강의 자연성 회복을 위해 버드나무숲을 조성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 팻말 중의 하나가 강월헌 정자 아래 빈 공간에 둘로 쪼개진 채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나무로 만든 이 팻말은 또 무슨 수난을 겪었던 것일까?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겠지만, 신륵사 버드나무는 신륵사에서 볼 수 있는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그 보물이 신륵사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신륵사 주변 강변 늪지를 깨끗하게 정화했다. 언젠가는 신륵사 강변에서 버드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될 날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믿는다.
 
신륵사 삼층석탑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남한강.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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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륵사, #버드나무, #은행나무, #향나무, #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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