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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년차 드라마 피디이자 아빠가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22일간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기록을 담은 여행 에세이입니다.  [기자말]
'소매치기를 조심하라!'

유럽 여행 소개 유튜브를 보면 꼭 나오는 내용이다. 심지어 소매치기의 수법을 재연해서 알려주기까지 한다. 연예인들이 나오는 TV예능에서까지 순간적인 소매치기나 날치기 시도 장면이 찍히기도 한다. 정말 유럽은 무법천지일까?
 
그런데 이런 경고는, 보통 자기가 직접 그런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는 데에까지 준비할 여유가 없어서다.

일단 교통편과 숙소, 스케줄을 정리하는 데에도 지쳐서 소매치기 같은 비상상황까지 대처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대신 우주를 불러 같이 소매치기 경고 동영상을 보았다. 그러니까 조심해 우주야, 휴대폰 잘 챙기고. 결국 당한 건 나였지만.

프랑스의 도시 니스에 정오 즈음에 도착하니 날이 엄청 화창했다. 십여일 간 스페인을 일정을 클리어하고 어릴 적 3년을 살았던 프랑스에 도착하니, 마치 제2의 고향에라도 온 듯 마음이 편했다. 여행지에 밤에 도착하면 무섭고 적대적으로 느껴지지만, 이런 날씨에 낮에 도착하면 도시로부터 환대를 받는 기분이다.

공항 밖에는 I LOVE NICE 조형물이 서 있었다. 나는 우주의 사진을 찍어주곤 트램 발권기에서 표를 사기 위해 지갑을 꺼냈다. 결제 중에 트램이 도착했다. 나는 서둘러 지갑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짐을 챙겨들고 우주와 트램을 탔다. 자리에 앉아 행복한 기분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어라, 지갑이 없다.
 
아 앞에서 사진 찍는 동안 타깃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가 좋아 뛰어다니는 어린이는 내 아들만은 아니다. 사진 속 아이도 그랬다.
▲ 공항 앞의 I Love Nice 조형물 아 앞에서 사진 찍는 동안 타깃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가 좋아 뛰어다니는 어린이는 내 아들만은 아니다. 사진 속 아이도 그랬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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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소매치기를 당하다니 

한 10여 초였을까. 난 믿을 수 없었다. 믿기 싫었다. 맞은 편의 한국인 관광객이(대학생 친구끼리의 여행으로 보이는 두 여성) 나의 실시간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주야.... 아빠, 지갑 도둑맞은 것 같아.'
'에엥 진짜요?'

 
두 여성은 이 대화도 다 듣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갑자기 말문이 터졌다.
 
'저기, 지갑 괜찮으세요?'
'네? 아... 네 저희는.'
'조심하세요 전 방금 도둑맞았네요'.
'아, 네......'
 

도대체 이런 오지랍은 왜 부리는 걸까. 맙소사. 자기 혐오가 덮친다.
 
2023년 올해는 니스 카니발의 150주년이었다. 동선이 썩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겨울의 니스를 스케줄에 굳이 넣은 것은 바로 이 카니발을 우주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트램에서 내리니 온 도시에 축제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니 소매치기도 가득하겠지.

보통 유럽의 겨울은 비수기다. 여전히 관광객이 많긴 하지만, 철새처럼 국경을 넘나든다는 유럽 소매치기들이 쉰다면 겨울이다. 굳이 겨울에 활동을 해야겠다 싶다면 150주년을 맞은 니스의 대형 축제 현장을 노리겠지. 신나서 공항 밖에서부터 사진 찍는 우리 부자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 목표물로 보였을까.
 
숙소에서 물어 경찰서를 찾아가 리포트를 작성했다. 이것도 유튜브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직업란에 연출자,라고 적자(그걸 굳이 왜 그렇게 자세히 적었을까? 지갑 찾아줄까봐?) 경찰관이 묻는다.

영화? 드라마? 뭐 연출했어? (한국도 아닌데 이걸 왜 묻지?) "네, <60일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를 연출했고, 미국 원작의 한국 버전입니다. 넷플릭스에서 보실 수 있어요"라고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한 후 더욱 급격히 부끄러워진다.

이건 뭐, 교통 사고를 당해 피 흘리며 쓰러져 있을 때 외국인이 '아유오케이?' 하고 물었는데 반사적으로 '아임파인땡큐'라고 대답하는 꼴 아닌가.
  
여기까지 온 것이 억울해서 경찰서 사진을 찍었다. 셀카까지 찍기에는 마음이 바닥을 쳤다.
▲ 니스 경찰서 전경 여기까지 온 것이 억울해서 경찰서 사진을 찍었다. 셀카까지 찍기에는 마음이 바닥을 쳤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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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엄한 '여행의 신'과의 조우  
 
터덜터덜 경찰서를 나오는데 갑자기 니스가 다르게 보였다. 프랑스가 다르게 보였다. 오만하다 관광객이여, 여행의 신이 나를 꾸짖는 듯 했다. 잠시 여행 온 주제에 고작 여기서 어릴 때 몇 년 살아봤다고 '제2의 고향'을 운운하다니. 관광객답게 지갑을 잘 털어주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여행 유튜버의 충고에 따라, 지갑을 두 개로 분리해 놓았다는 점이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신용 카드 두 장과 적지 않은 현금, 그리고 국제학생증이었다.

늦깎이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해외여행에서 할인을 받아보겠다고 부득부득 어렵게 발급받아 가져온 국제 학생증이다. 여행 와서 할인을 받아보려 했더니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거절당했던 그 학생증이다.

어쨌든 아직 절반의 현금과 다른 신용카드, 여권은 내게 남아 있다. 여행을 지속하는 건 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갑을 되찾거나 여행자 보험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포기하자.
  
행진할 때 쓰일 조형물들이 박람회처럼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 축제를 맞은 니스 행진할 때 쓰일 조형물들이 박람회처럼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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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자기 혐오가 밀려온다. 칠칠치 못하게. 정말 다 때려치고 싶어진다. 이래가지고 여행 마무리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여행 유튜버들의 소매치기에 대한 조언은 대개 이렇게 끝난다. 얼른 감정을 수습하고 남은 여행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 내가 넋을 놓고 있으니 아들도 서먹해한다.

서먹하게 굴다 점심 식사에서 실수로 음료수를 왕창 쏟는다. 나는 평소보다 더 강한 어조로 우주의 부주의를 지적하다가, 마음을 바로 잡는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나는 아빠잖아. 우주는 어린이잖아. 우주는 나만 믿고 여행을 따라 온 거잖아.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니스의 바다는 바로 한 블럭 옆에 있었다. 건물들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우주는 소매치기 따위는 아예 잊은 듯이 신나하기 시작했다. 니스의 해변은 둥글둥글한 자갈 해변이다.

모래놀이를 할 수는 없지만, 신발을 신고 해변을 따라 산책하거나 앉아서 책을 읽기에는 더 쾌적하다. 우주는 또 한 번 바지를 걷어붙이고 바다에 발을 담갔다. 이 시간이 좋으니? 오히려 아빠가 뭘 보러 가야 한다며 보채지 않아서 넌 더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바다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느릿느릿 머리를 날리며 수평선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사람들과 앉아서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 연인들. 홀로 멍하니 멀리를 바라보는 사람들. 2월이라 바다에 몸을 담그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개들은 신나게 물장구를 친다. 개들을 바라보다 나도 양말을 벗고 바다 속에 발을 담근다. 이 평화를 마음에 담자. 남은 여행을 더욱 소중하게 보내자.
  
같이 놀거나 마주보진 않았지만 수줍은 듯 상당히 오래 지근 거리에서 놀던 둘. 둘 다 내향형인가보다.
▲ 바다를 즐길 줄 아는 강아지와 어린이 같이 놀거나 마주보진 않았지만 수줍은 듯 상당히 오래 지근 거리에서 놀던 둘. 둘 다 내향형인가보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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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위에는 긴 포장된 산책로가 있다. 일명 '프롬나드 데 장글레(영국인의 산책로)'. 영국인들의 기여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19세기 초, 니스로 모여든 걸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목사가 이끄는 영국인들이 기획한 프로젝트란다.

실제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들 중에 우리 소매치기의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산책로로 올라오면 50미터 정도를 간격으로 구획마다 해변의 이름이 붙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내려가 있던 해변의 이름은 '여름의 시간'이었다. 겨울에 만난 여름의 시간.
  
니스 해변 중 하나의 이름
▲ 여름의 시간 니스 해변 중 하나의 이름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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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에는 니스 카니발 150주년을 맞아 수많은 홍보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었다. 축제를 구경하고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또 어린이들이 흥에 겨워 길을 걷고 있었다. 아들과 길을 걷다, 아까 트램에서 내가 지갑을 도둑맞은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목격했던 한국인 여행객들을 마주쳤다.

너무 정확히 눈이 마주쳐서, 나의 미세한 목례가 자동으로 나가려는데, 그 분들은 고개 각도를 살짝 돌려 나를 외면했다. 아니, 워낙 서로의 움직임이 미세하여 어쩌면 그 분들이 섬세하고도 어색한 목례를 시도한 건데, 내가 외면한 것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떠오른 그때... 좋았던 기억으로 다시 쓰기

생각해보니 나도 지금 우주 나이 즈음에 니스에 온 적이 있다. 파리에서 일하던 부모님이 큰 마음 먹고 내려온 여름 휴가였다. 아버지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에 내려갔는데, 그 해변이 누드비치였던 모양이었다. 휴가철이니 지금처럼 공간이 여유롭지 않고 해변 가득 빽빽하게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상반신을 훌훌 벗고 태닝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나보다 어렸을 아버지가 긴장하는 게 어린 나한테까지 전해졌던 기억이 난다. 덩달아 나도 긴장됐다. 아버지는 '허 참, 거 참' 등의 언짢은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갈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교의 나라에서 온 걸 감출 수 없는 어색한 선비들처럼. 그 길 끝에 우리는 해수욕을 했던가? 왜 그 기억 속에 어머니는 없었을까. 지금 떠오르는 기억은 그것 뿐이다.
  
니스 해변 위의 긴 산책로. 축제를 맞은 사람들
▲ 프롬나드 데 장글레 (영국인들의 산책로) 니스 해변 위의 긴 산책로. 축제를 맞은 사람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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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를 걷는데 거대한 관람차가 보였다. 갑자기 우주가 눈을 떼지 못한다. 우주는 무서운 걸 싫어하는데 웬일이지?
 
 '우주야 저거 타고 싶어?'
 '네!'
 

관람차가 번쩍 솟아올랐다. 우주는 숨막힐 듯 좋아한다. 해가 점점 내려오고 붉은 빛이 도시를 채색한다. 나도 신이 난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동안 이 순간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관람차의 회전 속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나는 이게 일종의 서비스인가 싶었는데, 우주는 가설을 세운다. 손님을 태우는 순간에 느려지는 것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 운영자는 손님마다 회전 수를 외우고 있어야 하는 거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관람차 안에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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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날 두 번, 다음 날 한 번 총 세 번 관람차를 탔다. 나는 관람차를 타본 적이 있던가. 살면서 한 번쯤은 있었겠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기억이 다시 쓰여지는 느낌이다. 타봤건 못 타봤건, 늘 관람차를 좋아해왔던 기억으로.
     
축제 분위기가 물씬하다.
▲ 관람차 밖에서 축제 분위기가 물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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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지만 오후 햇살이 따사롭다.
▲ 해변을 즐기는 커플과 어린이 2월이지만 오후 햇살이 따사롭다.
ⓒ 유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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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니스, #프랑스, #아들과아빠, #소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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